[데일리동방]“껍데기뿐인 허울 좋은 개혁이 아니라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 해결돼야 합니다. 촛불정부는 집권세력의 힘으로 이뤄낸 게 아니에요. 착각해선 안 됩니다. 그러니 민심이 차가워질 수밖에요.”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복지노동수석비서관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이태복 전 장관(70·현 사단법인 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지난 3일 기자와 만나 “개혁을 하려면 국민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 역시 입으로만 개혁을 외칠 따름이지, 좀처럼 (일을)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정부의 실패를 답습해선 안된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민주화세력에게 책임이 귀결되고, 앞으로 상당히 고전하게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장관과의 인터뷰는 지난 3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 전 장관은 이날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와 여야 정치권을 향해 작심한 듯 고언을 쏟아냈다.
이 전 장관은 최근 성명서 형태의 광고까지 일간지에 게재하며 종교계, 시민단체 등의 목소리를 모아 문재인정부에 전면적인 국정쇄신을 요구하고 나선 바 있다.
◆감염병 예방 위한 공공의료 시스템 구축은 절체절명 과제
그는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개혁 선명성과 당위성만 내걸었지 이를 추진할 구체적인 플랜과 전략이 부재하다고 비판했다.
이 전 장관은 일례로 이번 의료계 파업 사태를 들면서 “정부가 아무런 준비도 대안도 없이 외통수 싸움을 벌였다가 결국 백기투항을 한 셈”이라며 “그동안 의사협회 등 이익단체들이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해왔다는 점에서 의료계 파업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것인데 무얼 믿고 무작정 밀어붙였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꼬집었다.
“공공의료가 중요하다면서도 관련 예산은 하나도 배정하지 않았어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아요. 공공의료 시스템 구축은 대다수 국민들도 공감하고 있고 코로나19 사태 이후 감염병 예방을 위해서도 절체절명한 과제입니다. 여론을 조성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서 정책을 추진했어야 합니다.”
아울러 “국회에서 공론화 과정을 다시 거쳐서 국민에게 확실한 계획을 내놓되, 이와는 별도로 의사들의 불법 파업으로 인한 환자들의 사망 사고나 손해배상 문제는 확실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는 이번 의료계 파업 사태가 지난 2001년 의약분업 때와 닮은꼴이라고도 했다.
“2001년 의약분업 강행으로 후유증이 심각해지자 김대중 대통령께서 ‘낭패스러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물어오셨어요. ‘국민 부담만 늘어나고 민심 이반도 심각해질 겁니다. 2년만 유보하겠다고 대통령께서 직접 발표하셔야 합니다’하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도 당에서 끝까지 이걸 놓지 않았어요. 그러자 대통령께서 저를 덜컥 복지노동수석에 임명하시더군요. 그날 당‧정‧청 회의에 들어가서 ‘시골에 가면 단돈 1000원이 없어서 병원에 못가는 노인들이 수두룩하다. 이러고도 어떻게 국민의 정부라고 할 수 있나. 준비 안 된 의약분업을 밀어붙여 진료비가 폭증하고 건강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한데 정부가 재정 30%를 부담하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 전 장관은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원로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으로 7년4개월 동안 감옥에서 보낸 장기수에서 김대중정부 청와대 수석, 장관 자리까지 오른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김대중정부 시절 해박한 이론과 혜안으로 다수 정부 정책을 입안하는 데 앞장섰고,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故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국 향방과 국정 현안에 대해 '이 동지'라 호칭하며 자주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 전 장관은 취임 후 한 달여간을 장관실에 간이침대를 놓고 생활하는 등 의욕적 활동으로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인사가 만사...과감한 인적쇄신‧부정부패 공직사회 개혁
이 전 장관은 “예나 지금이나 관료들의 부정부패 정경유착 비리와 복지부동 행태는 여전하다”며 전반적인 국정쇄신을 위해 전문성과 헌신성을 갖춘 인사 기용과 함께 ‘관피아’로 얼룩진 공직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인사가 만사인데, 문 대통령의 인사 기준은 대선 캠프에 참여했는지 여부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현안을 해결하도록 해야 하는데, 인재풀이 너무 협소해요. 권력 중심부에 있는 일부 집권세력이 여전히 아마추어적인 사고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답답할 노릇이지요.”
이 전 장관은 조선 영조시대 청백리 이태중(1694∼1756)의 활동상을 소개하며 "선비로서 명분과 대의에 맞지 않으면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간언했고, 부패한 관리를 숙청하고 혈세 낭비를 뿌리뽑아 민생 구제에 힘썼다"며 “280여년 전의 인물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청백리 이태중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공직자들이 이태중을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우리 사회가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대외의존적인 경제 구조로 어려움에 봉착했고, 공동체 가치도 흔들리고 있다”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부가 종합적인 정책 플랜을 다시 세워야 하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재인정부가 한국판 뉴딜을 내놓았을 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사회 전반의 현안을 다 담아내는 청사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너무나 단편적인 정책들만 나열된 채 알맹이 없이 빈껍데기만 있었다”면서 "심지어 코로나 사태를 야기한 기후변화 대응 예산도 잡혀 있지 않았다"고 짚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소재부품산업 등 강소기업 육성, 공공의료‧노인요양‧보육 시스템 확대와 기본소득 강화 등 복지 수급 확대, 서민 주거 보장을 위한 부동산 정책 등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이 전 장관은 지난 2007년부터 ‘5대 거품빼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5대 운동은 경제회생과 일자리, 행정개혁, 복지정비와 국민생활 안정, 보건의료 구축, 교육혁신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5대 핵심과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 전 장관은 “소재부품장비산업만 잘 육성해도 3000억달러 정도는 국내 생산이 가능하고, 일자리가 50만개가 생긴다”며 “이것은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야 가능하다. 관료들한테만 떠넘겨서는 안된다는 게 이미 20년 전에도 입증된 거 아닌가”고 반문했다.
“김대중 정부 때도 소관부처인 산업부는 ‘소재부품장비를 국내에서 조달하려면 산업을 육성하는 데 앞으로 10년이 걸린다’고 난색을 표했어요. 그때 하던 얘기를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소부장 산업 육성은 대외의존성을 해소하고 경제불균형을 바로 잡는 중요한 방안이다고 겨우 설득해 7400억원 예산을 지원해줬는데도 그 돈을 어디다 썼는지도 모른다. 20년이 지나서도 왜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으면 과오가 되풀이될 겁니다.”
◆"부동산정책 성공에 文정부 명운 달려 있어"…서민 주거 복지에 힘써야
이 전 장관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 복지 확대도 강조했다.
우선 전국적으로 최소 5만명당 1개꼴로 보건소를 지어 공공의료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 의사 수를 안정적으로 늘리기 위해선 결국 수도권 인구 분산과 국가균형발전 측면에서 지역 거점도시 인프라가 잘 구축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급격히 빨라지는 고령화에 대비해서도 주거지와 가까운 곳에 노인요양시설을 늘려야 한다며 그 대안으로 500가구 이상 아파트 단지 내에 노인요앙시설을 설립, 방문간호사와 요양보호사를 둬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전 장관은 코로나19 여파로 영세자영업자‧소상공인의 시름이 깊어지는 지금, 여야 정치권의 기본소득 논의에는 적극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4대 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특수고용노동자를 포함한 전국민고용보험 추진에도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다만, 기본소득의 경우 기초생활보장제도, 노인기초연금 등과 연동될 수밖에 없어 재원 마련, 대상 선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대해 “이제 무슨 얘기를 해도 시장이 안 믿게 되어버렸다”면서 “문재인 정부 들어 3년 새 아파트 값이 엄청나게 치솟았다. 서민들이 월급으로는 집값은 물론 전월세도 감당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그는 “수도권에 몇 만, 몇 십만 가구 공급하겠다고 정책을 내놨는데, 뜯어보면 당장 시행하기도 어렵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며 “집값을 안정시키고 주거난을 해소하려면 서울 유휴지와 서민주거 밀집지역에 재건축 규제를 완화하고 용적률을 높여서 임대주택 공급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부동산정책이 성공하지 못하면 문재인정부의 성공은 장담하기 어려워진다"며 과감한 정책 전환을 재차 촉구했다.
“변화와 개혁은 매우 어렵고 또한 사회구성원 일부에게는 고통을 감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변화와 개혁은 국민 다수의 행복과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개혁의 명분을 갖고 중단없이 밀고 가려면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게 먼저입니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프로필
▲충남 보령 ▲국민대 법대 ▲도서출판 「광민사」 대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편집실장 ▲노동일보 발행인겸 회장 ▲대통령비서실 복지노동수석(2001년) ▲보건복지부 장관(2002년) ▲사회복지단체 「인간의 대지」 대표 ▲매헌 윤봉길 월진회 회장 ▲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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