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100년 기업의 조건] 한 세기 성장통에 손에 꼽는 장수기업…세대 교체 과제로

이범종 기자 2020-01-14 13:45:00
주요 기업 신년사마다 안 빠지는 100년...짧은 자본주의 역사 반영 일제강점·압축성장·외환위기 겪어낸 한국 기업, 세대 교체 지속성 과제로 "과도한 상속세가 경영승계 가로막아"…'자본이득과세' 도입 필요성 제기

1912년 8월 매일신보에 실린 보진재 개업 광고. [사진=보진재 제공]

[데일리동방] 새해 들어 기업들은 어김없이 100년 경영을 이야기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이근영 DB그룹 회장과 최정우 포스코 회장 등이 경영 현장 발언과 신년사를 통해 100년이라는 숫자를 과녁처럼 언급했다. 그만큼 한국에서 기업이 한 세기를 넘겨 살아남기 힘들다는 의미다. 한국 기업은 짧은 자본주의 역사와 외부 환경의 급격한 변화, 잘못된 관행 극복과 과세 방식 논란 등 경쟁력을 갖춘 100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벽이 많다.

◆100년 넘은 대기업 두산이 유일

올해 업력을 100년 넘긴 국내 기업은 두산그룹(모태 박승직상점・1896년), 신한은행(한성은행・1897년), 동화약품(동화약방・1897년), 우리은행(대한천일은행・1899년), 몽고식품(산전장유공장・1905년), 광장시장(광장주식회사・1911년), 보진재(보진재석판인쇄소・1912년), 성창기업지주(성창상점・1916년), KR모터스(대전피혁공업・1917년), 경방(경성방직・1919년) 등 10곳으로 파악된다.

이들 기업 가운데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선정한 공시 대상 기업집단에 지정된 곳은 15위 두산이 유일하다.

재계 1위 삼성은 고(故) 이병철 창업주가 1938년 문을 연 삼성상회가 모태다. 2위 현대자동차그룹은 2000년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됐다. 현대그룹의 자동차 사업은 창업주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시장에 뛰어든 1967년 시작됐다. 현대그룹 모태는 1937년 정 명예회장이 세운 경일상회다. 3위 SK그룹은 1953년 폐허가 된 소규모 직물공장에서 시작됐다. 4위 LG그룹은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 5위 롯데는 신격호 명예회장이 1948년과 1967년 각각 일본과 한국에서 제과 사업을 하면서 성장했다.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려도 대부분 업력이 반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중소기업연구원이 2018년 펴낸 ‘한국 장수기업 현황과 정책적 시사점’에 따르면 2016년 중소기업의 99.8%(69만6001개사)가 업력 50년이 안 됐다. 업력 100년을 넘긴 곳은 4곳에 불과했다.

◆소규모 가업 대대손손 이어온 일본

옆 나라 일본은 기업 역사가 깊다. 같은 연구에서 2016년 기준 창업 100년을 넘긴 일본 기업은 3만3069개사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1000년을 넘긴 곳이 7군데다. 가장 오래된 곳이 578년 세워진 사원 건축회사 곤고구미다. 꽃꽂이 회사 이케노보는 587년, 여관 니시야마온천은 705년에 문을 열었다. 다만 종사자 수 4명 이하인 소규모 기업이 전체의 33.8%로 가장 많았고 300인 이상인 기업은 3.3%에 불과했다.

산업별로는 제조업(26.4%)과 소매업(23.1%), 도매업(21.6%) 순으로 많았다. 매출액 규모도 ‘10억엔 미만’이 70%를 차지한 반면 10억엔 이상 50억엔 미만은 12.1%로 적었다. 대기업이 되기 위해 본업을 저버리지 않고 분수를 지키며 대대로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모습이다.

자본주의가 발흥한 서구 역시 768년 세워진 독일 와인 업체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 공구 회사 보쉬(1886년), 미국 초콜릿 회사로 1894년 문을 연 허쉬 컴퍼니, 자동차회사 포드(1903년),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1856년), 덴마크 칼스버그(1848년) 등 기업 역사가 깊다.

업력 200년 이상 가족 기업 단체 에노키안협회 회원사는 현재 49곳이다. 이 가운데 프랑스가 15곳으로 가장 많고 이탈리아(12곳), 일본(9), 독일(4), 스위스(3), 네덜란드와 벨기에(각 2곳), 영국과 오스트리아(각 1곳) 순이다.

기업이 업력을 더해가면 산업 경쟁력과 고용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은 2018년 세법 개편에서 사업승계세제를 확충하고 주식 양도에 따른 상속세를 10년간 유예하는 등 고령화에 따른 승계 진단과 지원에 나서고 있다.

침략과 전쟁을 연달아 겪은 한국과 이웃나라를 착취해 2차대전 패전까지 발전해온 일본은 상업사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2018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배상을 선고한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은 중일전쟁 등을 앞두고 1934년 야하타제철소 등 7개 철강업체가 합병해 출범했다. ‘군함도’로 알려진 일본 하시마섬은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석탄 채굴을 위해 시멘트를 매립하고 콘크리트 벽을 둘러 군함 같은 모습을 갖게 됐다. 이곳에 끌려간 조선인은 500~800명으로 추정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압축성장 속 정경유착 과거...형제의 난 등 오너리스크 여전

한국은 다른 해외 선진국에 비해서도 자본주의 역사가 짧다. 기업을 둘러싼 외부 환경도 군부독재 압축 성장과 직선제 확보, 외환위기 등으로 급변해왔다. 그 사이 정경유착과 무리한 사세 확장 등 여러 변수가 작용해 기업의 흥망성쇠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재벌(財閥)이 있다.

재벌(자이바츠)은 일본 메이지 시대 말기 처음 사용됐다. 이 단어는 정상(政商)과 함께 쓰였는데 정치와 유착해 부를 쌓은 재계 인사를 가리킨 말이다. 군함도를 만든 미쓰비시도 처음 해운으로 시작해 조선, 광산, 상사, 은행 등으로 사업을 넓혔다. 한국에서는 삼성과 현대, LG 등이 부상한 1950년대 언론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저서 ‘한국 재벌사 연구’에서 일본 학자들을 인용해 재벌의 특징을 △가족의 소유지배 △다각화된 사업경영체 △독과점적 지위 유지로 정리했다.

일본에서는 재벌이 2차 세계대전 패전 뒤 맥아더 미국 사령관에 의해 해체됐지만 한국에서는 고도성장기에 출현했다.

최 원장에 따르면 재벌은 한국전쟁 이후 잠재기를 거쳐 1961~1973년 경제개발 초기, 1973~1987년 중화학공업 육성기, 1987~1997년 재벌정책(공정거래위원회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 도입기, 이후 외환위기 등으로 성장과 해체를 이어갔다. 한국 재벌은 혈연주의 문화에 따른 가족중심 소유 경영과 경영권 세습, 정부의 압축성장 정책 등이 어우러져 몸을 키웠다. 1980년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 조치 등 정부가 중복 과잉투자를 해소해 재벌 산업 영역을 재조정했다. 국민의정부 당시 진행된 대기업 간 빅딜도 한 사례다.

이 과정에서 반세기 이상을 버티지 못하는 재벌이 속속 생겨났다. 1980~2007년 기준으로 흥하거나 현상 유지 된 대기업집단은 삼성・SK・한화・롯데・금호아시아나・두산・동양・태광・동부 등 9곳이었다. 반면 대우와 쌍용・국제・동아건설・삼미・한일합섬・기아・한양・해태・대농 등 10곳은 해체됐다. 당시 재벌의 공통점은 흥망을 막론하고 가족중심 황제경영과 문어발식 다각화 경영, 과도한 그룹확장과 차입경영, 수출 의존형 업종 등이었다.

반면 문 닫은 대기업은 대체로 외환위기 직전인 1995년 과도한 부채로 계열기업을 늘리면서 수익성 확보도 못하고 경영권 안정화도 도모하지 못해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30대 재벌 중 8곳이 외환위기 때 도산했다. 대우그룹은 부채를 이용한 부실기업 인수로 몸집을 키웠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로 전 기업이 비상경영을 할 때도 1조7000억원 부채를 투입해 쌍용차를 인수했다. 또한 부채를 숨기기 위한 분식회계로 기업부실이 더해졌다.

다만 경영권 세습이 흥망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해당 기간 해체된 재벌 10곳 중 4곳이 창업 당대에 문을 닫았다. 6곳은 세습 후 해체됐다. 순위가 오른 9곳 가운데 7곳은 세습 이후 순위가 올랐다.

오늘날 재벌은 인공지능(AI)을 비롯한 4차산업혁명 주특기를 개발해 저만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SK그룹처럼 사회가 겪는 문제점 해결을 이익의 원천으로 삼는 ‘사회적 가치’에 집중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현대와 한진, 효성, 삼성, 롯데 등에서 벌어진 '형제의 난' 등 재벌 내 오너 리스크 극복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중소기업도 장수기업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정부는 고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명문 장수기업’ 확인 제도를 2016년 시작했다. 조건은 45년 넘게 사업을 유지하고 경제적・사회적으로 기여하며 혁신 역량이 우수한 회사다.

명문 장수기업에 선정되면 해당 마크를 사용하고 정부 포상에 우선 추천된다. 기업 홍보와 네트워킹 지원 등을 받는다. 연구개발(R&D)과 수출, 정책 자금, 인력 등 중소기업벤처기업부 지원 사업에서 가점도 받는다.

◆상속세 부담돼 영속 어렵다는 경영자들

이 같은 정부의 노력에도 과도한 상속세가 경영승계를 가로막는다는 불만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의 ‘2018년 중견 기업 실태 조사’에서 중견기업 84.4%는 ‘기업 승계 계획이 없다’고 답했는데 가장 큰 이유(69.5%)가 상속세 부담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중앙회의 ‘2019 중소기업 가업승계 실태조사’에서도 가업승계 계획이 있는 기업 중 정부의 가업상속공제제도를 활용할 계획이 있다고 답한 기업이 30%에 불과했다. 없다고 답한 곳은 25.8%에 달했다. 가업상속공제제도 이용계획이 없는 이유 중 가장 많은 응답이 ‘사후요건 이행이 까다로워 기업의 유지·성장에 도움 될 것 같지 않아서(25.8%)’였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제도 이용 건수와 금액은 2017년 91건 2226억원에 불과했다. 1997년 도입된 이 제도는 10년 이상 경영한 매출 3000억원 미만 중소・중견기업에 최대 500억원을 공제해준다.

이에 중견기업의 세대교체를 기술과 경영 노하우 전수로서의 가업 승계가 아닌 ‘부의 대물림’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해 높은 경영 의욕과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정부는 공제 후 10년간 업종・자산・고용 등 유지 의무 기간을 7년을 줄이는 개편안을 지난해 냈다. 사후 관리 기간 중 20% 이상 자산 처분이 금지됐지만 업종변경 등 경영상 필요할 경우 예외를 두기로 했다.

재계에서는 높은 상속세를 기업 영속의 장벽으로 보고 세제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원활한 기업승계를 위한 상속세제 개편방향’을 내고 과중한 상속세 부과 대신 승계취득가액 과세(자본이득과세) 도입을 제안했다. 자본이득과세는 상속시 과세하지 않고, 상속받은 자산을 추후 유상 처분할 때 피상속인과 상속인의 보유기간 동안 자본이득을 합산해 양도소득으로 과세하는 방법이다.

현행 직계비속(아래 세대)에 대한 상속세 최고세율 50%는 OECD 평균 최고세율 25.3%의 2배에 달하고 일본(55%) 다음으로 높다. 여기에 최대주주 할증을 합치면 65%로 최고 세율이 된다. 일본은 지난해 4월 ‘신사업승계제도’로 납세 유예 대상 주식 수의 상한을 없애고 승계 후 5년간 80%라는 고용조건을 못 지켜도 계속 유예되도록 해 기업 승계를 장려하고 있다.

연구원에 따르면 캐나다와 호주, 스웨덴 등 13개국이 소득 재분배와 경제적 기회 균등 실현이 어렵다는 판단으로 2000년대 이후 상속과세를 폐지하거나 미도입했다. 상속세를 폐지한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스웨덴 등은 자본이득세로 대체했다.

한국도 일자리 창출과 국가 경제를 위해 기업 승계 때 실현되지도 않은 이익에 대한 세금을 매기지 말고 추후 자본이득세를 부과해 일종의 조세 장벽을 없애자는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