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루미늄으로 만든 거대한 날개를 가진 철(鐵)새가 비상하고, 치유의 문으로 통하는 벽체는 출입문을 열어 나를 반긴다.
덩그러니 바닥에 놓인 철제는 소통의 공간을 열고, 대지를 덮고 하늘을 향한 손길은 죽음으로 도달한 엄숙한 장소를 기린다.
4개의 '낯선자들의 앙상블'이 치유의 공간을 열고 관람객을 기다린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과 천안시 동남구에 있는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은 한국 추상조각 1세대 선구자인 엄태정(81) 작가의 개인전 '두 개의 날개와 낯선자'를 각각 2월 24일과 5월 12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엄태정 작가의 1969년부터 2018년도까지 50년간의 작품을 서울과 천안에서 조각, 드로잉 등 50여점을 선보인다.
주연화 아라리오갤러리 실장은 지난 21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아라리오 갤러리와 엄태정 작가가 만나서 하는 첫 전시이고 50년 동안의 작품을 풀어놓다 보니까 공간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서울과 천안 양쪽 공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며 "조각은 주로 천안에서 전시하고 2000년대 이후에 주로 한 평면작업은 서울에서 전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 실장은 이어 "아라리오에서 컬렉션을 가진 작품도 있고, 80년대 90년대 특히 2000년대 이후에까지 끊임없이 작업이 새로워지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며 "엄태정 작가를 아라리오에서 제대로 보여줘 보자는 취지로 이 전시를 기획했다"고 덧붙였다.
엄태정 작가는 개인전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이번 전시도 지난 2013년 신세계 갤러리(부산) 이후 6년만이며, 평균 5년마다 한 번씩 개인전을 열고 있다. 최근 신작인 '낯선자' 시리즈도 전시에 포함됐다.
이날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에서 만난 엄 작가는 "항상 5년 동안 작업을 하다 보면 한 번 전시할 수 있는 양의 조각이 준비된다" 며 "작가는 항상 좋은 공간에서 발표하기를 고대하고 있고 이번에 좋은 기회가 왔다. 또 다른 낯선자를 만나는 그런 일로 내가 치유되는 공간 속에 낯선자를 넣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제프쿤스 조각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한국 화단에서 1세대 추상조각 작가로 분류되는 엄태정 작가는 조각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재료를 기술적으로 잘 다루는 것보다는 그 안에 예술성을 담는 것을 강조했다.
"조각을 하는 사람은 조각하지 않아야 제대로 조각을 한다. 조각을 손재간으로 만들고 보면 예술은 안보이고 기술만 보인다."
이 말은 조각가는 기본적으로 손재간이 좋기 때문에 작품의 예술성이나 작품성이 손재간으로 저해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엄태정 작가는 조각의 예술성과 기술을 설명하기 위해 한병철 교수가 쓴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책을 상기시켰다.
책에서는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 현대 미술가인 제프쿤스(Jeff Koons)의 작품을 등장시킨다. 엄 작가는 제프쿤스의 작품을 보면 '번쩍번쩍 빛나서 광택이 나고 피부가 너무 고와서 어쩌면 아름다워서 혀로 핥아주고는 싶은데 접근하기는 싫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디지털시대의 예술이라고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는 이 조각이 과연 조각다운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는지 살아있는 예술성이나 작품성이 그 안에 보이는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제대로 된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볼 수 있도록 아름다움을 구원하는 그런 발견이 있어야겠다는 그런 얘기로 (작가가 제프쿤스)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실제로 엄태정 작가는 몇 년 전에 퐁피두 현대미술관에서 제프쿤스의 작품을 봤고, 자신과 조각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조각 예술은 이러지 않는데, 그러면서 한편 생각이 조각에 이르는 길이 꼭 내가 가는 길하고 같을 필요는 없다. 조각에 이르는 예술의 길이 그 방법이 다양할 것이다. 제프쿤스는 팝 아티스트이다. 굉장히 미국적이고 어쩌면 자본주의에 상징적인 하나의 예술 장르이다."
▶"조각가는 경외로운 태도로 물성을 대한다"
엄태정 작가는 조각의 재료, 즉 물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60~70년대 초반까지는 철, 70~80년대까지 구리를 다루고 2000년대 초반에 알루미늄을 시작했다.
"조각은 물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조각가는 경외로운 태도로 물성을 대한다. 금속 조각을 할 때도 금속이 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금속을 초대해서 금속을 만나러 간다. 경외로운 물성을 초대해서 작업하므로 그 물성을 절대 함부로 다루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는 손재간을 부리는 조각을 위한 조각은 조각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절대 물성에 과도한 기술을 보이거나 과도한 타격을 가하거나 하면 안 된다.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입맞춤'이라는 작품을 보면 끌질하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돌인데 작품성이 훌륭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 경지까지 가야 아름다운 조각 예술이 탄생한다."
작가는 철의 물질성에 매료돼 청주교대 교수 시절 1967년 '절규'로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철을 자르지 않고 그 철판을 그대로 이용해 작업했다. 하지만 작가의 철 작업은 소멸의 벽에 부딪혀 변화를 맞는다.
철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스페인의 조각가 에두아르도 칠리다(1924~2002)는 철이 녹이 나서 떨어져 나가는 것도 하나의 작품성이라고 했지만, 엄태정 작가는 소멸해서 사라지는 것은 작가로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칠리다의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 물성을 존경하지만 녹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반영구적인 재료의 물성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동을 만나게 됐다."
동은 반영구적이고 잘 녹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현재까지 동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동은 물성이 너무 강하고 정열적이다. 때로는 조용하고 시적인 작업을 원했던 그는 알루미늄이라는 재료를 만나게 된다. 지금은 알루미늄에 철을 가미한 작품을 하고 있다.
"2000년도부터는 알루미늄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알루미늄에 쇠를 곁들인다. 쇠와 알루미늄은 아주 좋은 인연을 맺고 있다. 서로 내식성이 있어서 녹이 안난다. 그래서 금속공학에서 대단히 궁합이 잘 맞는 재료라고 얘기를 한다."
▶"낯선자는 신과 같은 존재"
최근작인 낯선자 시리즈는 이렇게 알루미늄과 철의 조합으로 탄생했다. 사각의 알루미늄 통판과 철 막대가 만나 작품이 됐고, 작품의 무게 만큼 낯선자는 경외로운 뜻을 내포한다.
낯선자는 배철현 전 서울대 교수가 쓴 '인간의 위대한 질문'에 등장한다. 낯선자는 영어로 스트레인저(stranger)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 전혀 다르다. 낯선자는 삶을 의존할 수 있는 의존자이자 삶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자, 어쩌면 구원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가 낯선자의 개념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크리스천인 저는 기도합니다. 내가 조각이 되기를 조각이 내가 되기를, 나는 치유한 공간을 만나서 내가 만든 낯선자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고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자의 개념은 소울이나 내 안에 있는 영혼을 만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번 작품전의 큰 주제는 '치유의 공간'이다. 작가는 아라리오 천안 전시장에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대비되는 4개의 낯선자를 배치해 '낯선자들의 앙상블'이라는 치유의 공간을 완성했다. 이 네 개의 낯선자는 각각 '어느 평화로운 공간', '엄숙한 장소','두 개의 날개와 낯선자', '고요한 벽체와 나'이다.
"네 개의 낯선자는 내 치유하는 공간으로 내가 만나서 모셔둔 공간이다. 처음에 갤러리 공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라리오 앙상블'이라는 부제를 붙였다가 낯선자가 낫겠다 싶어서 '낯선자들의 앙상블'이라고 붙였다."
▶황금색으로 물들인 전시 공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 1층에 들어서면 1250kg이 넘는 거대한 알루미늄 조각이 관람객을 맞는다. '대지의 침묵'이라는 조각으로 바닥을 제외한 250kg짜리 알루미늄판 5개를 붙여 정육면체를 만들고 모서리에 검은 철을 붙여 형태를 완성했다.
스스로 '물신주의자'라고 칭하는 작가는 최대한 가공을 피해서 재료 자체를 순수하게 탐구하는 철학이 있다. 즉 재료를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철학을 표현했다.
작가는 알루미늄과 철은 절대 서로 녹을 쓸지 않게 하는 재료라고 말을 한다. 재료들이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타자가 만나서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는 철학을 물질을 통해서 표현했다.
조각 주변에는 작가가 2000년대부터 꾸준히 지속해 온 평면 작품들이 전시됐다.
'틈'연작은 잉크 펜을 이용해 무수히 선을 반복적으로 그려 완성한 작품이다. 선을 촘촘히 그어 모양을 완성했지만 희끗희끗 보이는 틈 속으로 광명이 들어와 어둠을 이겨낸다는 철학이 있다.
지하 전시 공간에는 온통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품들이 모여 있다.
구리로 만든 1987년작 '은하계의 별들' 조각을 중심으로 최근에 완성한 '하늘도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Endless Coumn-Mandala', 'Endless Column-Galaxy', 'Endless Column' 등 드로잉 작품들이 걸려있다.
특히 'Endless Column'은 1cm 간격으로 총 2만개의 사각형을 일일이 하나씩 뜯어내고 그 안을 채워 넣으면서 조형을 구성한 것이다. 이 작품을 한 점 제작하는데 거의 3~4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엄태정 작가 누구?
1938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엄태정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세인트 마틴스에서 수학하였으며,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를 역임했다. 1967년 국전 국무총리상, 1971년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 2012년 이미륵 상 등을 수상하였고, 광주 상공회의소 화랑 개인전을 시작으로 상파울로 비엔날레, 런던 우드스탁 갤러리, 베를린 게오르그 콜베 뮤지엄, 서울 성곡미술관 개인전 외 다수의 국내외 전시에 참여하였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2013년부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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