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은 지금 추상(抽象)의 시대이다. 미술품 경매에서 국내 낙찰 금액 순위의 1위부터 6위까지가 김환기의 추상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미술에서 추상은 더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단지 물감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재료와 아이디어로 발전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뤄지면서 미술도 새로운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탄생하게 됐다. 특히 사진의 발달은 구상을 주로 했던 작가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도전을 요구했고, 이후 추상미술은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구현됐다.
어떤 작가는 캔버스 자체의 물성을 변화시켜 직조(織造)를 이용하는가 하면, 전자제품을 분해해서 그 부품을 이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시중에 출시된 여러 회사의 물감 제품을 이용해 새로운 비교 작품을 만들기도 하며, 아예 회화를 캔버스가 아닌 웹(web)으로 옮겨 디지털로 구현하기도 한다.
일상의 사물들의 외피를 벗겨내 새로운 형식으로 나열하는 시도도 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금호미술관에서는 이달 1일부터 9월 2일까지 현대 미술에서 시도되고 있는 대표적인 추상 작품들을 모아 기획전 '플랫랜드(Flatland)' 전을 연다.
참여한 작가는 김용익, 최선, 차승언, 김진희, 박미나, 김규호, 조재영 등 모두 7명이다.
전시 제목인 '플랫랜드'는 19세기에 출간된 에드윈 애벗(Edwin A. Abbott)의 소설 '플랫랜드 Flatland'에서 착안한 것이다.
2차원 세계에 사는 정사각형이 3차원의 구를 만나게 되고, 구가 자신의 3차원을 아무리 설명해도 정사각형은 2차원 내에서만 세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3차원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김윤옥 큐레이터는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소설은 당시 19세기 영국 사회가 지닌 한계적인 사고방식을 비판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다" 며 "인식의 확장을 강조하는 점에서 추상이 지니는 인식의 확장 가능성, 오늘날 사회가 바라보는 확장 가능성의 잠재적인 측면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서 전시 제목으로 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즉 도시화가 만연하게 이뤄진 오늘날의 상황에서 도시의 외형이 작가들에게 조형적 자극이 되기보다는 도시의 이면 이야기들과 문제들, 이슈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로써 추상을 취하게 된다.
▶김용익 작가 "내 작품은 추상이 아닌 개념화"
이번 전시에서 김용익 작가는 땡땡이 무늬를 새롭게 해석한 '유토피아'를 선보였다.
'유토피아'는 한 개의 회화가 아닌 방 전체를 뒤덮은 설치 작품이다. 방 전체를 두른 땡땡이 무늬가 있고 여러 개의 드로잉 작품은 마치 물에서 무늬를 떠내듯 벽면의 땡땡이 무늬를 건져 올리고 있다. 공간 중간에 걸린 빈 캔버스도 보인다. 땡땡이 무늬가 번뇌이고 캔버스가 인간이라면 아무것이 없는 빈 캔버스는 번뇌가 없는 진정한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유토피아'는 형태상 추상으로 보이지만, 작가는 추상이 아닌 개념화라고 얘기한다.
김용익 작가는 "추상이라는 것이 낯설다. 지금까지 추상이 아닌 작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추상은 시각적인 것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만 개념 미술은 시각적인 것으로 설명이 안 된다. 이론이 있어야 작품이 이해된다" 며 "세상이 복잡해지니까 미술도 복잡해지는 추세이다. 작품을 설명하는 텍스트가 필요하고 그게 계보학의 개념인데 그것을 모르면 내 그림은 절반밖에 이해를 못 한다"고 강조했다.
모더니즘(Modernism) 계보학이라는 것은 미술사에서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을 계속해오면서 파생된 여러 가지 미술 현상들이다.
'유토피아'작품 또한 그러하다. 계보학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작가가 직접 캔버스의 의미와 땡땡이 무늬의 의미를 알려줘야 완전한 감상이 된다.
빈 캔버스는 과거 말레비치도 시도한 적 있다. 하지만 김용익 작가는 공간을 포함해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빈 캔버스를 제시한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익 작가는 "벽면으로 캔버스를 확장하면서 일상 세계와 회화라고 하는 예술 세계와의 확실한 차이를 지워버리고 흐려버리는 요소를 넣었다. 인식론적인 질문임과 동시에 모더니즘 계보에 확실하게 들어서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최선 작가 "10대부터 90대까지 모여 내 작품을 만든다"
최선 작가의 전시작 '나비'는 길이 28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의 관람자 참여형 작품이다.
마치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모양의 이 작품은 참여자들의 '날숨'으로 만들어졌다.
최선 작가는 "소식(消息)이라는 것이 내 숨을 떼서 다른 사람한테 전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을 시각화시킬 수 없을까 하다가 2014년에 세월호 참사 이후 생명이 경시되는 일이 있지 않았나 해서 숨 쉬는 것을 아름답게 만들 수 없을까 라는 고민으로 시작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00원에서 500원짜리 동전만 한 물감을 떨어뜨리고 참여자들은 그것을 입으로 불어서 모양을 만들어 냈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 불었다면 손바닥 정도 크기의 쭉쭉 뻗어 나가는 나비가 되고, 90대 노인이 불었다면 동전 크기에서 조금밖에 벗어나지 못한 나비가 된다.
실제로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나비 작품의 오른쪽 끝부분은 물감이 마치 춤을 추듯 활기찼지만, 90대 어르신들이 참여한 왼쪽 끝부분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최선 작가는 "전 세계 사람들의 숨을 같은 색과 방식으로 모아보면 누구 건지 모르게 뒤섞여 있고 다채롭기도 하다" 며 "최근 남북 관계가 좋아지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한때 뒤섞여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직조(織造)로 추상을 만들어낸 차승언 작가
차승언 작가는 직조(織造)를 이용해 추상을 풀어냈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 베틀로 씨실과 날실을 겹쳐 섬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추상은 우리나라에 급하게 들어왔다. 시간의 비약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소화하지 못하는 추상의 언어를 베틀 짜는 행위로써 다듬어 가기 시작했다.
베틀 같은 경우는 시간의 비약이 있을 수 없다. 씨실과 날실이 교차로 겹쳐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런 직조 하는 행위를 통해서 모더니즘의 추상 회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출품한 작품에서 작가는 캔버스 프레임을 직접 짠 천으로 덥기도 하고, 듬성듬성 짠 천으로 프레임 자체를 노출하기도 하며, 캔버스 프레임에 맞춰서 패턴을 넣어서 직조하기도 한다. 캔버스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2000년도 초반에 동대문 시장에서 유행했던 수세미 천을 떼서 직조 회화로 표현을 하기도 하고, 동대문 시장에 있는 천막천 패턴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은 요소에 집중한 김진희 작가
김진희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은 요소에 관심이 있다.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먼지가 내려오는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더니 몸에 떨어지는 순간 먼지의 무게를 느꼈고 거기에서 오는 전율을 잊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결국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출품작 '인간의 그릇'은 마치 커다란 그물 같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전자제품에 쓰이는 저항·콘덴서 등이 촘촘히 연결돼 있다.
작가는 대학원 시절에 본인의 눈 상태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눈앞에 방충망 같은 막이 보이면서 사물의 원근감이나 질감이 왜곡돼 보이기 시작했다.
눈의 초점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서 바깥 풍경이 보이기도 하고, 막에 집중하면 막만 보이게 된다. 인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비교를 통해 규정을 드러낸 박미나 작가
박미나 작가는 추상 회화를 이용해서 외부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되는 프레임을 드러냈다.
'12 Colors' 시리즈는 시중에서 판매 중인 12가지 유화 물감세트를 브랜드별로 색을 펴 바른 캔버스를 조합한 작품이다.
유화 물감에서 반듯이 써야 하는 12가지의 색들이 각각 브랜드마다 다르게 돼 있는 것을 비교 할 수 있다. 비슷한 색들도 있지만 브랜드에 따라서 전혀 다른 색들도 포함돼있다. 브랜드마다의 색 규범을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BK' 시리즈의 경우에는 검은색을 만들어 내는 노란색과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을 조합한 작품이다. 작품은 디자이너들이 많이 사용하는 일명 '빵빵자'라고 불리는 '탬플릿자'를 이용해 순차적으로 색을 칠한 것이다.
결국의 브랜드마다 노란색과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이 모여 검은색을 만들어 내지만, 미묘한 차이의 검은색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웹사이트 자체가 작품인 김규호 작가
김규호 작가의 '잔광(Afterglow)'은 가상의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그 추상적인 언어는 '0'과 '1'로된 이진법의 컴퓨터 언어이다.
작품은 완결된 형태의 비디오 작품이 아니라 웹사이트를 켜 논 것이다.
영상 같은 경우는 완결된 형식으로 전시되지만, 웹사이트는 링크를 알 수 있다면 스마트폰으로도 볼 수 있고 노트북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디바이스(장치)의 호환성에 따라서 이미지가 깨지기도 하고 오류가 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런 변형 가능성, 다변적인 측면에서 웹사이트에 매력을 느끼고 이를 기반으로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외형 벗기고 새로운 것을 본 조재영 작가
조재영 작가의 '앨리스의 방'은 온통 나무로 만든 가구들이 배치돼있다. 하지만 가구들은 외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외피가 벗겨져 있고 모양도 해체된 후 다시 재조합돼있다.
어떤 거는 벽으로서 기능하는 것도 있고, 어떤 거는 가구 같기도 하고 어떤 거는 조각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작가는 경계 불분명한 형태들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모호한 가공적인 특성이 오늘날의 추상 미술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작가는 얘기한다.
현대미술에서 추상은 늘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다. 모더니즘 속에서 추상에 접근했던 작가부터 미디어를 통해서 추상을 이해하는 작가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에서 추상의 단계를 볼 수 있는 전시이다.
하지만 현대 미술에서 추상은 더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단지 물감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재료와 아이디어로 발전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뤄지면서 미술도 새로운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탄생하게 됐다. 특히 사진의 발달은 구상을 주로 했던 작가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도전을 요구했고, 이후 추상미술은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구현됐다.
회화에서 캔버스는 더는 절대적 공간이 아니다. 전시 공간 자체를 예술 공간으로 확장한 시도가 있었다. 또한 작가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하여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경우도 있다.
어떤 작가는 캔버스 자체의 물성을 변화시켜 직조(織造)를 이용하는가 하면, 전자제품을 분해해서 그 부품을 이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시중에 출시된 여러 회사의 물감 제품을 이용해 새로운 비교 작품을 만들기도 하며, 아예 회화를 캔버스가 아닌 웹(web)으로 옮겨 디지털로 구현하기도 한다.
일상의 사물들의 외피를 벗겨내 새로운 형식으로 나열하는 시도도 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금호미술관에서는 이달 1일부터 9월 2일까지 현대 미술에서 시도되고 있는 대표적인 추상 작품들을 모아 기획전 '플랫랜드(Flatland)' 전을 연다.
참여한 작가는 김용익, 최선, 차승언, 김진희, 박미나, 김규호, 조재영 등 모두 7명이다.
전시 제목인 '플랫랜드'는 19세기에 출간된 에드윈 애벗(Edwin A. Abbott)의 소설 '플랫랜드 Flatland'에서 착안한 것이다.
2차원 세계에 사는 정사각형이 3차원의 구를 만나게 되고, 구가 자신의 3차원을 아무리 설명해도 정사각형은 2차원 내에서만 세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3차원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김윤옥 큐레이터는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소설은 당시 19세기 영국 사회가 지닌 한계적인 사고방식을 비판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다" 며 "인식의 확장을 강조하는 점에서 추상이 지니는 인식의 확장 가능성, 오늘날 사회가 바라보는 확장 가능성의 잠재적인 측면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서 전시 제목으로 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즉 도시화가 만연하게 이뤄진 오늘날의 상황에서 도시의 외형이 작가들에게 조형적 자극이 되기보다는 도시의 이면 이야기들과 문제들, 이슈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로써 추상을 취하게 된다.
▶김용익 작가 "내 작품은 추상이 아닌 개념화"
이번 전시에서 김용익 작가는 땡땡이 무늬를 새롭게 해석한 '유토피아'를 선보였다.
'유토피아'는 한 개의 회화가 아닌 방 전체를 뒤덮은 설치 작품이다. 방 전체를 두른 땡땡이 무늬가 있고 여러 개의 드로잉 작품은 마치 물에서 무늬를 떠내듯 벽면의 땡땡이 무늬를 건져 올리고 있다. 공간 중간에 걸린 빈 캔버스도 보인다. 땡땡이 무늬가 번뇌이고 캔버스가 인간이라면 아무것이 없는 빈 캔버스는 번뇌가 없는 진정한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유토피아'는 형태상 추상으로 보이지만, 작가는 추상이 아닌 개념화라고 얘기한다.
김용익 작가는 "추상이라는 것이 낯설다. 지금까지 추상이 아닌 작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추상은 시각적인 것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만 개념 미술은 시각적인 것으로 설명이 안 된다. 이론이 있어야 작품이 이해된다" 며 "세상이 복잡해지니까 미술도 복잡해지는 추세이다. 작품을 설명하는 텍스트가 필요하고 그게 계보학의 개념인데 그것을 모르면 내 그림은 절반밖에 이해를 못 한다"고 강조했다.
모더니즘(Modernism) 계보학이라는 것은 미술사에서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을 계속해오면서 파생된 여러 가지 미술 현상들이다.
'유토피아'작품 또한 그러하다. 계보학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작가가 직접 캔버스의 의미와 땡땡이 무늬의 의미를 알려줘야 완전한 감상이 된다.
빈 캔버스는 과거 말레비치도 시도한 적 있다. 하지만 김용익 작가는 공간을 포함해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빈 캔버스를 제시한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익 작가는 "벽면으로 캔버스를 확장하면서 일상 세계와 회화라고 하는 예술 세계와의 확실한 차이를 지워버리고 흐려버리는 요소를 넣었다. 인식론적인 질문임과 동시에 모더니즘 계보에 확실하게 들어서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최선 작가 "10대부터 90대까지 모여 내 작품을 만든다"
최선 작가의 전시작 '나비'는 길이 28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의 관람자 참여형 작품이다.
마치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모양의 이 작품은 참여자들의 '날숨'으로 만들어졌다.
최선 작가는 "소식(消息)이라는 것이 내 숨을 떼서 다른 사람한테 전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을 시각화시킬 수 없을까 하다가 2014년에 세월호 참사 이후 생명이 경시되는 일이 있지 않았나 해서 숨 쉬는 것을 아름답게 만들 수 없을까 라는 고민으로 시작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00원에서 500원짜리 동전만 한 물감을 떨어뜨리고 참여자들은 그것을 입으로 불어서 모양을 만들어 냈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 불었다면 손바닥 정도 크기의 쭉쭉 뻗어 나가는 나비가 되고, 90대 노인이 불었다면 동전 크기에서 조금밖에 벗어나지 못한 나비가 된다.
실제로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나비 작품의 오른쪽 끝부분은 물감이 마치 춤을 추듯 활기찼지만, 90대 어르신들이 참여한 왼쪽 끝부분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최선 작가는 "전 세계 사람들의 숨을 같은 색과 방식으로 모아보면 누구 건지 모르게 뒤섞여 있고 다채롭기도 하다" 며 "최근 남북 관계가 좋아지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한때 뒤섞여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직조(織造)로 추상을 만들어낸 차승언 작가
차승언 작가는 직조(織造)를 이용해 추상을 풀어냈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 베틀로 씨실과 날실을 겹쳐 섬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추상은 우리나라에 급하게 들어왔다. 시간의 비약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소화하지 못하는 추상의 언어를 베틀 짜는 행위로써 다듬어 가기 시작했다.
베틀 같은 경우는 시간의 비약이 있을 수 없다. 씨실과 날실이 교차로 겹쳐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런 직조 하는 행위를 통해서 모더니즘의 추상 회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출품한 작품에서 작가는 캔버스 프레임을 직접 짠 천으로 덥기도 하고, 듬성듬성 짠 천으로 프레임 자체를 노출하기도 하며, 캔버스 프레임에 맞춰서 패턴을 넣어서 직조하기도 한다. 캔버스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2000년도 초반에 동대문 시장에서 유행했던 수세미 천을 떼서 직조 회화로 표현을 하기도 하고, 동대문 시장에 있는 천막천 패턴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은 요소에 집중한 김진희 작가
김진희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은 요소에 관심이 있다.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먼지가 내려오는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더니 몸에 떨어지는 순간 먼지의 무게를 느꼈고 거기에서 오는 전율을 잊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결국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출품작 '인간의 그릇'은 마치 커다란 그물 같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전자제품에 쓰이는 저항·콘덴서 등이 촘촘히 연결돼 있다.
작가는 대학원 시절에 본인의 눈 상태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눈앞에 방충망 같은 막이 보이면서 사물의 원근감이나 질감이 왜곡돼 보이기 시작했다.
눈의 초점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서 바깥 풍경이 보이기도 하고, 막에 집중하면 막만 보이게 된다. 인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비교를 통해 규정을 드러낸 박미나 작가
박미나 작가는 추상 회화를 이용해서 외부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되는 프레임을 드러냈다.
'12 Colors' 시리즈는 시중에서 판매 중인 12가지 유화 물감세트를 브랜드별로 색을 펴 바른 캔버스를 조합한 작품이다.
유화 물감에서 반듯이 써야 하는 12가지의 색들이 각각 브랜드마다 다르게 돼 있는 것을 비교 할 수 있다. 비슷한 색들도 있지만 브랜드에 따라서 전혀 다른 색들도 포함돼있다. 브랜드마다의 색 규범을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BK' 시리즈의 경우에는 검은색을 만들어 내는 노란색과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을 조합한 작품이다. 작품은 디자이너들이 많이 사용하는 일명 '빵빵자'라고 불리는 '탬플릿자'를 이용해 순차적으로 색을 칠한 것이다.
결국의 브랜드마다 노란색과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이 모여 검은색을 만들어 내지만, 미묘한 차이의 검은색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웹사이트 자체가 작품인 김규호 작가
김규호 작가의 '잔광(Afterglow)'은 가상의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그 추상적인 언어는 '0'과 '1'로된 이진법의 컴퓨터 언어이다.
작품은 완결된 형태의 비디오 작품이 아니라 웹사이트를 켜 논 것이다.
영상 같은 경우는 완결된 형식으로 전시되지만, 웹사이트는 링크를 알 수 있다면 스마트폰으로도 볼 수 있고 노트북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디바이스(장치)의 호환성에 따라서 이미지가 깨지기도 하고 오류가 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런 변형 가능성, 다변적인 측면에서 웹사이트에 매력을 느끼고 이를 기반으로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외형 벗기고 새로운 것을 본 조재영 작가
조재영 작가의 '앨리스의 방'은 온통 나무로 만든 가구들이 배치돼있다. 하지만 가구들은 외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외피가 벗겨져 있고 모양도 해체된 후 다시 재조합돼있다.
어떤 거는 벽으로서 기능하는 것도 있고, 어떤 거는 가구 같기도 하고 어떤 거는 조각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작가는 경계 불분명한 형태들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모호한 가공적인 특성이 오늘날의 추상 미술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작가는 얘기한다.
현대미술에서 추상은 늘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다. 모더니즘 속에서 추상에 접근했던 작가부터 미디어를 통해서 추상을 이해하는 작가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에서 추상의 단계를 볼 수 있는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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