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기자수첩] 희망이 없어도 되는 세상을 희망하며

김인규 수습기자 2024-12-18 09:00:39
김인규 수습기자
[이코노믹데일리]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한 시민이 들고 있던 피켓에 적힌 검정치마의 'Antifreeze' 노래 가사 중 일부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위 현장은 마치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 같았다. 놀랍게도 탄핵안 가결 전부터 그랬다. 찬바람 부는 겨울 국회 앞 도로와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윤석열을 탄핵하라"고 외치며 분노하다가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도로 옆 가판에는 닭꼬치와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가 들어섰고 하늘에는 페스티벌에서나 보이던 깃발이 펄럭였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에는 절망을 유머로 승화하는 힘이 있었다. 12·3 비상계엄으로 군병력이 투입된 국회로 달려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모인 시민들부터 애초에 폭력으로 권력에 맞서지 않았다. 시위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실을 유희하고 풍자하며 절망에 대응했다. 윤 대통령을 아내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사랑꾼으로 풍자하는 등 각종 밈도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독일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농담은 흘리지 않은 눈물”이라고 말했듯, 우리의 절망까지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대통령과 자신들의 이익을 재느라 표결에 참여조차 하지 않은 국회의원들의 만행은 국민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들이 정말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라면 지난 7일 있었던 1차 탄핵안 표결에 참여해야 했다. 신념에 따라 찬성하든, 당론에 따라 반대하든, 하다못해 기권을 하든, 투표에는 참여했어야 했다.

1차 탄핵안이 의족정족수 미달로 폐기되자 국민들은 정파를 뛰어넘어 남녀노소 한 마음으로 거리에 나왔다. 2차 탄핵안이 의결되던 지난 14일 오후 여의도에 모인 시민의 수는 경찰 추산 20만·주최측 추산 200만명이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 국회를 향해 달려갔던 시민들보다 몇 배나 더 많았고, 1차 탄핵안이 표결됐던 날의 두배가 넘는 수였다. 시민들의 손에는 피켓과 함께 글자 ‘탄핵’이 번쩍이는 응원봉들이 들려 있었다. 한 외신은 이를 보고 “한국 사람들은 나라가 어두울 때, 집에서 가장 밝은 것을 들고나온다”고 평했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 한 시민이 기자에게 건넨 쪽지 [사진=김인규 기자]

희망은 역설적으로 희망 없는 자리에서 비로소 피어난다고 한다. 지난 14일 여의도 한복판을 뛰어다니는 수습기자였던 나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지금 현장에서 마주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희망’을 작게 중얼거린다. 희망 없는 정치권을 바라보며 더 이상 희망을 꿈꾸지 않아도 되지 않는 세상을 희망한다.

“희망은 답이 아니다.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라고 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속으로는 이미 탈진 상태인 이들에게 앞으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희망은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 필요한 위안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