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들 "뭉쳐야 산다"…변화하는 합종연횡 트렌드

성상영 기자 2024-05-07 06:00:00
"명분보단 실리" 헤쳐 모이는 기업들 경제 성장기엔 '선진 기술 도입' 우선 국가가 주도하거나 위기 대응 목적도 면밀한 검토와 신중한 접근 이뤄져야
조주완 LG전자 사장(왼쪽)과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운데), 권봉석 ㈜LG 최고운영책임자(COO·오른쪽)가 지난 2월 28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확장현실(XR) 사업과 관련한 논의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LG전자]
[이코노믹데일리] 기업 간 합종연횡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신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기존 사업의 경쟁력을 높이거나 생태계를 강화하는 등 목적도 다양하다. 원자재와 부품 공급에 협력하거나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수준을 넘어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기업들이 힘을 합치는 이유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고 어느 한쪽에는 없는 기술이나 영업망을 다른 쪽에서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혜영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2021년 보고서에서 "합작 투자와 제휴를 통해 비용 부담과 위험이 2개 이상 기업으로 분산돼 개별 기업의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술 전수에서 '기술 선도'로

6일 국내 주요 대기업의 협력 사례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시기별로 힘을 합치는 유형과 목적은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가 성장하고 기업의 기술과 덩치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면서 '합종연횡 트렌드'는 달라졌다. 또한 급변하는 산업 환경도 이러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과거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글로벌 기업과 제휴를 맺거나 이들로부터 자본을 유치하는 일이 많았다. 경제 개발이 본격화한 196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 국내 기업은 미국·일본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제품을 생산했다.

전자와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이다. 국산 흑백 TV가 처음 생산된 1966년 금성사(현 LG전자)는 일본 히타치와 기술 도입 계약을 맺었고 삼성전자는 1970년 산요전기와 손을 잡았다. 삼성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사업을 하며 도시바를 조력자로 구하기도 했다. 현대차는 1968년 포드의 '코티나'를 조립 생산하고 1986년 일본 미쓰비시와 '데보네어(그랜저)'를 공동 개발했다.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진 기업과의 라이선스 제휴는 한국의 산업이 단기간에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한국 기업은 '위탁 생산→기술 도입→독자 모델 개발→국산화'라는 과정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핵심 플레이어로 올라섰다. 세계화가 화두로 떠오른 1990년대에 정보기술(IT) 부문 전략적 제휴는 유럽과 미국으로의 판로 확장이 주된 목적이었다.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해 지난 1월 26일 머스크에 인도한 메탄올 추진 초대형 컨테이너선 '아네머스크호' 모습 [사진=HD현대]
한국이 중국을 비롯한 후발주자의 추격을 받으면서 기업 간 협력 양상도 바뀌었다. 조선과 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의 저가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사업 경쟁력 강화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HD현대와 한화오션은 머스크, 하파그로이드 등 대형 해운사와 함께 친환경 선박인 메탄올·암모니아 추진선 보급에 나섰다. 석유화학 업황 부진으로 고전 중인 롯데케미칼은 일본 이토추상사, 미쓰비시상사 등과 손잡고 암모니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가 주도로 새 판 짜기가 이뤄지는 모습도 엿보인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한국·일본·대만 등 군사적 동맹국과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자국 내 투자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한편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중국으로 장비·부품 수출을 금지하는 채찍도 들었다. 이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해 합종연횡을 유도하는 사례다.

인공지능(AI) 열풍도 연합의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를 향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는 잇따라 구애에 나섰다. 경쟁 관계인 인텔과 퀄컴, 구글, 메타 등은 엔비디아에 대항해 머신러닝(기계학습) 프로그램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지난해 오픈AI의 대화형 AI '챗GPT'에 대항해 '가우스'를 내놓은 삼성은 오픈AI가 주도하는 AI 반도체 연합에 합류할 예정이다. 경쟁과 협력 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히는 모양새다.

◆무심코 합쳤다간 '독'

기업 간 합종연횡 전략이 반드시 성공하거나 순조롭지만은 않다. 사업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거나 섣부른 시장 변화 예측 등은 실패의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된다. 섣부른 전략적 제휴와 합작법인 설립 역시 독이 될 수 있다.

삼성은 자동차 산업에 진출할 당시 기아차 인수가 무산되자 2000년 프랑스 르노그룹과 공동 투자해 르노삼성자동차(현 르노코리아)를 설립했다. 이미 외환위기를 거치며 현대차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된 상황에서 신규 사업자의 진입은 어려웠다. 끝내 삼성은 르노그룹에 지분을 넘겼고 현재 삼성카드가 보유한 약 13%마저 매각이 추진 중이다.

LG전자와 SM엔터테인먼트가 2022년 설립한 홈 피트니스 합작법인 '피트니스캔디'는 2년 만에 청산 절차를 밟게 됐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집안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LG전자의 정보기술(IT) 역량과 SM의 콘텐츠 경쟁력을 합쳐 보자는 취지였다. 엔데믹(일상적 유행)을 내다보지 못한 채 감염병 대유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노린 게 패착이었다.

큰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잡음이 생긴 곳도 있다. 최근 네이버는 일본 소프트뱅크와 합작한 '라인야후'에 대한 경영권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라인야후는 메신저 서비스 '라인'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본 정부가 네이버의 지분율을 줄이라고 압박하고 있다. 일본에서 2011년 서비스를 시작한 라인은 인구 약 80%가 사용 중인 일본의 국민 메신저로 등극했다. 지진·태풍 등 재난이 잦은 일본에서 라인이 국가 기간 통신 역할을 하자 외국 기업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정부가 개입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