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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아의 정치 잇슈] 대통령의 아버지들

박경아 논설위원 2023-08-19 16:54:49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1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의 발인식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박경아
[이코노믹데일리]대통령과 아버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 부자다. 아버지는 제41대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 허버트(H) 부시이고, 아들은 제43대 대통령 조지 워커(W) 부시다. 둘 다 공화당이었지만 양자에 대한 평가는 대조적이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투기 조종사였고 레이건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정치계 모범생이었으나 단임 대통령이었다. 반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장남으로 야구를 매우 좋아해 구단주가 되기도 했던 아들 부시 대통령은 다소 방탕한 삶을 살다 정치계에 입문해 9.11테러를 계기로 이라크 침공을 결정하고 재선에 성공한 다소 드라마틱한 인물이 됐다. 이들 부자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의 부자(父子) 대통령이란 기록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아버지를 언급하기엔 사례가 썩 많지 않다. 그간 대통령 아버지로서 유일무이하게 회자되던 분이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버지 고 김홍조 옹이시다. 지난 2000년 아들인 김영삼 대통령 생가를 경남 거제시에 기념관으로 기부하고 2008년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거제에서 가족들이 대대로 운영해온 멸치어장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정치판에 발을 들인 아들을 뒷바라지하며 매년 명절 때면 아들 지인들에게까지 멸치 선물을 보낸 걸로 유명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아들이 대통령이 됐을 때에는 한번도 청와대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 아버지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보여주시는 이가 한 분 더 생겼다. 지난 15일 노환으로 별세한 윤석열 대통령 부친 고 윤기중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다. 본인이 학문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학자였음에도 대통령 아버지였기에 더 신중하고 과묵한 길을 걸은,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하고 평생 학문을 연구한 존경받는 학자”였다.

윤 교수 지인과 제자들은 고인을 ‘대통령 아버지’보다 ‘학자 윤기중’으로 기억한다. 고인은 한국 통계학의 태두로 불리는 석학이었다. 193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공주농고를 거쳐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한·일 수교 직후인 1967년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 1호로 선발돼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68년 귀국 후 연세대 상경대학 교수로 부임했고 1997년까지 강단에 섰다. 

윤 교수는 경제 현상을 통계학적으로 해석하는 연구를 바탕으로 통계학뿐 아니라 경제학계에도 업적을 남겼다. 한국통계학회장(1977~1979)과 한국경제학회장(1992~1993)을 역임했고, ‘통계학’(1965), ‘수리통계학’(1974), ‘통계학개론’(1983) 등을 집필했다. 교수가 된 뒤에도 연구에 끈을 놓지 않고 특히 자본주의 시장의 불평등에 천착해 ‘성장과 소득불평등도의 국제비교’(1984) ‘한국경제 불평등 분석’(1997) 등의 논문을 남겼다.

윤 교수는 정년 퇴임 뒤에도 연구를 이어갔다. 최근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진 거의 매일 연세대 명예교수실로 출근을 했다고 한다. 고인은 자신의 나이가 70대 후반이던 2005년과 2008년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의 저서 ‘페티의 경제학’과 영국 통계학자 존 그라운트의 저서 ‘사망표의 제관찰’ 번역서를 출간했다. 불과 3년 전인 2020년엔 대한민국학술원 논문집에 ‘중상주의 경제정책에 관한 연구’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올해 초 대한민국학술원 행사도 참석했다.

고인은 꼿꼿한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고인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석사 학위만으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대신 간단한 논문만 쓰면 박사학위를 주는 ‘구제(舊制) 박사’ 제도가 있었지만 윤 교수는 “나눠주는 박사가 무슨 쓸모 있느냐”며 이를 거부했다.

윤 교수가 세상을 떠나니 이제야 나오는 이야기다. 지난해 5월 10일 윤 대통령 취임식 당시 통상 대통령 가족은 VIP로 분류돼 취임식 단상에 앉는 것이 관례였지만 고인은 일반석에 앉아 아들의 취임식을 지켜봤다.

자신의 생일이던 지난해 7월 12일 용산 대통령 집무실을 방문해 아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도 윤 교수는 “국민만을 바라봐야 한다”고 아들에게 조언했다고 한다. 윤 교수는 자신의 오랜 지인인 이종찬 광복회장에게 “내 아들이 잘못된 길로 간다면 기탄없이 쓴소리를 해달라”한 당부한 것으로 한 언론이 전했다.

고인은 엄한 아버지였다. 윤 대통령이 유년 시절 콩서리를 하자 고무호스로 종아리를 때렸다. 또한 따뜻한 아버지였다. 윤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수사,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등 검사로서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고인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오랜 지인들은 오늘날의 강직한 윤 대통령을 만든 것은 9할이 윤 교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윤 교수가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입학 기념으로 선물한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선택할 자유’는 윤 대통령의 철학 정립에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힌다. 

윤 교수는 아들이 사법고시 9수를 하던 시절에도 답답해하거나 별다른 재촉을 하지 않고 오히려 기본서에 충실하라며 원리를 파고들라 주문했다. 아들이 사시에 합격한 뒤에는 부정한 돈도, 공짜 밥도 거절하라며 빈 지갑에 슬쩍 돈을 넣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도 재임 중 종종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지난 2월 연세대 졸업식 축사에선 “아버지 연구실에서 방학 숙제를 하고 수학 문제도 풀었다. 아름다운 연세대 교정에서 고민과 사색에 흠뻑 빠졌다”고 고백했다. 3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아직도 히토쓰바시 대학이 있는 구니타치시의 거리가 눈에 선하다”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이날 윤 교수는 윤 대통령 도착 20분 뒤에 별세했다고 한다. 윤 교수가 의식이 있을 때 윤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잘 자라줘서 고맙다.” 이승을 떠나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남길 수 있는 최상의 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