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말 세마리부터 파기환송까지' 이재용ㆍ삼성의 롤러코스터 5년

이범종 기자 2019-08-30 08:47:21
1심, 징역 5년→2심, 징역 2년6월 집유 4년→대법, 원심 파기 '비메모리 세계 1등' 목표 등 이재용 체제 구축 본격화 日 무역보복ㆍ이재용 구속 가능성 등 대내외 불확실성↑
29일 오후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데일리동방] 총수의 집행유예 선고가 파기환송된 29일 삼성의 표정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이날 대법원 풍경을 닮았다.

정오를 앞두고 군가 ‘멸공의 횃불’이 울려퍼진 서초동 대법원 인근은 차벽 열 아홉대와 경력 수십명으로 통행이 제한됐다. 건너편 인도는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무효를 외치는 시민들의 태극기가 성조기와 함께 휘날렸다. 예전에 비해 줄어든 규모지만 쩌렁쩌렁한 결기는 여전했다. “이럴 때 젊은이들이 일어서야 돼. 북한에 적화통일 된단 말이야!” 자칭 ‘애국시민’의 절규에 가까운 함성은 선고 중계를 앞둔 404호 기자실까지 이어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공동정범으로 묶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 씨의 운명이 전환점을 앞두고 있었다.

깜박. 깜박…. 오후 2시가 다가오자 퀭한 눈들이 컴퓨터 화면 속 커서를 신호등처럼 바라본다.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파란불이 켜지자 손가락 수십 개가 키보드를 질주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세 사람의 2심 선고를 모두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박 전 대통령은 뇌물죄 등 재임 중 직무 관련 저지른 죄를 다른 죄와 병합해 선고한 점이 문제가 됐다. 공동정범인 최씨는 기업들에 대한 강요죄에 협박 요소가 불충분하다는 판단이다. 이 과정에서 80억원대 삼성 뇌물 수수 유죄 판단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차례가 되자 대법원은 그를 뇌물 요구의 피해자로 판단한 2심을 뒤엎고 1심의 뇌물・횡령 유죄 판단을 되살렸다. 사건은 서울고법에 파기환송됐다.
 

29일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경찰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다시 꾸는 악몽, 정유라의 말

이렇게 삼성은 한동안 잊고 지낸 악몽을 다시 마주했다. 시작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독대한 2014년 9월 15일. 운명의 롤러코스터가 레일에 들어선 날이다.

1・2심 판단을 종합하면 박 전 대통령은 1차 단독면담에서 이 부회장에게 삼성의 대한승마협회 회장사 활동과 승마 유망주 올림픽 참가 지원을 요구했다. 이후 최순실씨는 삼성 임원들이 딸 정유라씨 승마 지원을 소홀히 한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이듬해 7월 25일 이 부회장을 불러 질책하고 올림픽 출전 준비와 승마지원을 요구했다. 27일 이 부회장은 임원들과 대책회의를 열고 향후 승마협회 파견 인사 교체 등 지원 계획을 세웠다.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원 지원도 이 시기 결정됐다. 이후 여의도에서 정유라 씨 승마 지원금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굴뚝의 연기는 2016년 7월 짙어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도해 만들었다고 알려진 미르・K재단 설립 당시 대기업 모금액이 500억원을 넘었고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보도가 시작됐다. 의혹은 같은해 9월 국회 국정감사 때 쟁점으로 떠올랐다.

달이 바뀌며 주저앉을뻔한 사건의 꽁무니에 불이 붙었다.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의 국정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다. 그해 10월 24일 ‘JTBC 뉴스룸’의 비선실세 최순실 씨 태블릿PC 보도 이후 운명의 초침이 이 부회장을 뒤쫓기 시작했다. 다음날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촛불은 하나 둘씩 광화문을 향하기 시작했다.

11월 3일 최씨 구속 이후 박 대통령이 2차 담화를 발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같은달 12일 광화문에 시민 100만명이 모여 대통령 하야를 외쳤다. 29일 대통령은 3차 담화로 국회 결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국회는 12월 1일 박영수 특별검사를 임명했다. 이 부회장의 넥타이가 불편해진 시점이다.

12월 6일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온 이 부회장은 이날 만남에서 대통령이 직접 미르・K재단 기부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실무자들이 보고 없이 전경련을 통해 기부했다는 취지였다. 후일 특검이 적용한 그의 공소 혐의에는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이 포함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9일 재적의원 300명 중 234명 찬성으로 가결됐다. 이날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를 접수한다.

그 사이 특검은 서울 강남구에 사무실을 내 국정농단 사건 수사에 돌입했다. 이듬해 1월 10일 특검팀은 최씨 태블릿PC에서 삼성의 지원금 관련 이메일을 다량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12일 이 부회장을 밤샘조사한 특검은 뇌물・횡령 혐의로 법원에 구속 영장을 청구했지만 19일 새벽 기각됐다. 삼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특검의 추가 수사와 영장 재청구로 이 부회장은 2월 17일 구속되고 만다. 혐의는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횡령), 특경법 위반(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삼성전자 제공 ]

◆집행유예로 새 시대 선언, 日 암초 '덜컹'

반 년에 걸친 ‘세기의 재판’ 1심에서 그가 받은 선고는 징역 5년이었다. 유죄로 인정된 뇌물액은 특검이 주장한 298억2535만원 중 89억2227만원이다. 승마 지원금 72억9427만원에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 16억2800만원을 합친 액수다.

1심은 사건을 이 부회장이 아버지 이건희 회장 이후를 대비해 경영진과 승계 작업 도움을 기대하고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으로 규정했다. 정유라씨 승마 지원이 수동적이었지만 결국 경영 승계 도움을 바란 청탁 성격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반년 뒤인 지난해 2월 5일, 2심 재판부는 코어스포츠 용역대금 36억3484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뇌물・횡령을 무죄로 판단하고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삼성 경영진을 겁박하고 측근 최씨가 그릇된 모성애로 사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삼성이 수동적으로 뇌물을 공여한 사건으로 봤다. 소극적 뇌물공여는 물론 50억원 미만의 뇌물액, 횡령액 전액 반환 등 감경 사유를 적극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정유라씨 승마 지원금 중 말 구입과 부대비용 41억6251만원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용역대금과 마필, 차량들의 무상 사용 이익을 뇌물로 인정했다.

법원은 살시도와 비타나, 라우싱 등 말 소유권은 삼성에 있다고 판단했다. 횡령액이 50억원 밑으로 떨어지자 형량이 낮아졌다. 이 부회장이 1심 때 유죄로 인정된 횡령액 80억9095만원을 2심 재판 도중 변재한 점도 감경 사유가 됐다.

지난해 2월 5일 집행유예로 출소한 이 부회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돌아볼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 됐습니다. 앞으로 더 세심하게 살피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후 이 부회장은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이재용 체제 구축에 나섰다. 지난 4월 133조원 투자와 1만5000명 고용을 전제로 비메모리 반도체 세계 1등을 선언했다. 박근혜 정권을 적폐로 규정한 문재인 대통령도 곁에서 삼성을 응원했다.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사진=이범종 기자]

◆“뇌물 맞다” 대법 판단에 “기회 달라” 호소

이재용 체제 기반을 다지던 삼성은 7월 3일 일제 전범기업 판결에 대한 일본의 무역보복에 맞닥뜨린다. 한국이 반도체 기초소재 수입을 일본에 의존하던 동북아 가치사슬이 깨지면서 반도체 극자외선(EUV) 공정도 차질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삼성전자 2분기 실적도 신통치 않았다. 전년 동기대비 매출 4%, 영업이익은 8.27% 떨어졌다. 모바일(IM) 부문은 전분기보다 31% 떨어졌다. 5G 시대를 연 갤럭시S10의 저조한 실적과 갤럭시 폴드 출시 연기 등이 원인이었다.

이 부회장은 일본 출장과 국내 사업장 방문으로 위기 극복 의지를 보였다. 대법원 선고를 앞둔 총수가 몸 사리지 않고 경영에 전념한다는 평가와 법원을 향한 장외 변론이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운명의 날, 대법원은 수십억원대 부대비용을 지우고 마필과 차량 무상 사용 이익을 뇌물로 본다는 2심 판단이 법리는 물론 상식에도 안 맞다며 파기했다. 영재센터 지원금도 이 부회장 경영승계를 위한 부정청탁이 맞다며 1심 판단을 따랐다. 36억원이던 이 부회장 뇌물공여액이 86억원으로 다시 늘어났다. 이 부회장 1심은 뇌물액을 89억원으로 본 반면 박 전 대통령 뇌물수수액은 2심에서 말 보험금을 제외한 86억원이 인정됐다.

삼성이 그나마 안도한 부분은 재단출연금 1・2심에 이어 재단출연금 204억원이 문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2심 모두 삼성이 전경련 ‘사회협력비 분담비율’에 따라 수동적으로 출연했고 승계 작업을 묵시적으로 인식하고 냈다는 증거도 없다고 봤다.

무기징역도 가능했던 재산국외도피죄는 1심 때 일무 무죄가 선고되면서 형량이 5년으로 맞춰졌다. 2심과 대법원은 전부 무죄 판단했다. 대법원도 2심 판단을 수용했다.

이전까지 공식 입장이 없던 삼성은 파기환송 직후 입장문을 내고 대내외 불확실성을 강조했다. 스마트폰 등장으로 도태된 노키아 사례를 언급하며 ‘기회를 달라’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삼성은 입장문에 대한 설명문까지 내 “현재 삼성 내부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바깥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 ‘위기를 돌파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삼성의 미래와 과거의 자신을 함께 마주해야 하는 이재용 부회장의 복잡한 속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