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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현대건설, 약속이 멈추자 실적도 멈췄다

한석진 기자 2025-11-10 11:02:38

토지 분쟁과 공사비 갈등, 법적 다툼 너머에서 드러난 '기업의 약속'의 무게

현대건설 계동 사옥. [사진=현대건설]

[이코노믹데일리] 서울 강남의 핵심 재건축 단지인 압구정3구역이 흔들리고 있다. 현대건설이 조합과 토지 소유권을 두고 맞서면서 사업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합은 “절차상 문제일 뿐”이라며 일정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하지만, 조합원들은 “사업이 중단될 수도 있다”며 불안해하고 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압구정3구역은 36만㎡에 달하는 대규모 사업지로, 완공 시 강남권 재건축의 상징으로 꼽힌다. 그러나 최근 조합과 현대건설의 관계가 흔들리며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토지 소유권 반환 문제’가 있다.
 

문제의 토지는 강남구 압구정동 462번지를 포함한 9필지로, 총면적 약 4만㎡에 이른다. 전체 구역의 10%를 차지하며 시가로는 약 2조5900억원 규모다. 이 부지는 1970년대 아파트 건설 당시 현대건설이 건물 소유권만 분양자에게 이전하고 토지 소유권은 남겨둔 채 행정 절차를 마무리하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당시 감독기관이던 서울시가 해당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해결 상태로 남았다.
 

이후 조합원들은 “현대건설이 해당 토지를 소유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현대건설에 “토지 소유권을 아파트 소유주들에게 이전하라”는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상장기업으로서 주주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며 “일부 지분만 이전할 경우 배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이행하지 않고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법적으로는 아직 확정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조합은 현대건설이 곧 토지를 넘겨줄 것이라며 조합원들을 안심시켰지만, 현대건설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불신이 확산됐다.
 

조합 관계자는 “토지 문제는 준공 전까지만 해결되면 된다”고 설명했지만, 현장 분위기는 다르다. 인근 공인중개사는 “조합이 진정시키려 해도 이미 조합원들의 표심에는 불안이 스며들었다”며 “재건축은 법보다 신뢰가 먼저다”라고 말했다.
 

현대건설의 신뢰 논란은 압구정을 넘어 법정에서도 드러났다. 지난해 법원은 대구 중구 78 태평상가아파트 가로주택정비사업과 관련해 한국토지신탁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현대건설의 책임을 인정하고 132억55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 사업은 2018년 한국토지신탁이 시행자로 지정된 뒤 2020년 현대건설이 시공을 맡으며 시작됐다. 그러나 2022년 현대건설이 공사비 488억원 증액을 요구하며 착공을 미루면서 갈등이 발생했다. 계약서에는 공사비 조정 기준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로 명시했지만, 현대건설의 요구액은 기준보다 세 배 이상 많았다.
 

한국토지신탁은 “계약 범위를 벗어난 요구”라며 공사 개시를 촉구했지만, 현대건설은 “공사비 조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사업은 1년 넘게 멈춰섰고, 법원은 “정당한 이유 없이 공사를 미룬 책임은 현대건설에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현대건설이 물가지수 조항을 명확히 수용했으며, 경제상황 변화가 계약 효력을 뒤집을 만큼 중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시공사가 합의된 기준을 스스로 뒤집으며 공사를 미루면 그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정비사업의 지연은 금융비 부담과 조합원 피해로 직결된다. 법원은 현대건설의 행위를 계약상 합의 위반으로 보고 시공사 책임을 명확히 했다.
 

현대건설의 신뢰 문제는 이제 숫자에도 나타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현대건설의 올해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은 5342억원으로, 연간 목표치(1조1828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매출은 23조원을 넘었지만 영업이익률은 2.32%에 불과하다.
 

지난해 자회사 현대엔지니어링의 해외 프로젝트 손실로 1조원대 적자를 냈던 여파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턴어라운드 기대감이 있었지만, 폴란드 석유화학 프로젝트 본드콜(보증금 청구)과 인도네시아 발릭파판 플랜트 손실로 다시 수익성이 흔들렸다. 이에 대해 한 증권사 연구원은 “현대건설의 실적 부진은 단순한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라며 “국내외 프로젝트에서 신뢰가 흔들릴수록 수주 경쟁력도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기업의 실적은 숫자로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신뢰가 깔려 있다. 이해관계자와의 약속을 지키는 기업이 결국 시장의 신뢰를 얻고, 신뢰는 곧 브랜드 가치로 이어진다. 반대로 신뢰를 잃으면 계약과 실적 모두 흔들린다.
 

현대건설은 여전히 원전, 인프라, 주택 등에서 성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는 불가리아 대형 원전 본계약과 미국의 소형모듈원전(SMR) 착공이 기대된다. 그러나 기업의 지속 성장에는 기술력보다 신뢰가 더 근본적이다.
 

압구정3구역의 지연과 대구 정비사업의 패소는 다른 사건이지만, 공통된 교훈을 남긴다. 약속을 미루면 공정표가 멈추고, 신뢰를 잃으면 실적이 흔들린다. 현대건설의 위기는 법리나 재무지표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신뢰가 무너지면 숫자는 흔들리고, 신뢰를 회복하면 실적은 돌아온다.

지금 현대건설이 회복해야 할 것은 공사비나 원가율이 아니라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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