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읽나" 변호사도 궁금한 탄원서 효력
이 부회장 뇌물공여 사건 파기환송심은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가 심리한다. 19일 기준 이 부회장을 위한 탄원서만 14개다. 제목에 ‘엄벌 촉구’가 붙은 탄원서는 6차례 제출됐다. 이밖에 개인이 보낸 ‘서울고등법원에 바랍니다’는 탄원서 내지 참고자료로 분류된다. 탄원서는 사건 당사자(피해자)가 아니어도 쓸 수 있다. 이번 재판에서 이 부회장 측이 제출한 탄원서는 아직 없다. 피고인 반성문 제출도 하지 않았다.
형사사건에서 탄원서가 미치는 영향은 당사자와 변호인 모두 궁금해한다. 법원 출신 변호사가 듣는 질문이 ‘판사가 탄원서를 읽느냐’다. 대답은 ‘일단 써야 한다’로 끝난다. 법관 마음을 움직일 가능성을 단 1%라도 높여보려는 ‘지푸라기라도 잡기’여서다.
대법원은 8월 이 부회장 뇌물공여 규모를 86억원으로 판단했다. 파기환송심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는 지난달 25일 1회 공판기일에서 “대법원 파기 환송 판결이 상당 부분 정리됐으므로 양형 기일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 측은 유무죄를 다투지 않고 양형공판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번 재판만 놓고 볼 때 탄원서의 효력은 미미하다는 것이 법조계 중론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1억원 이상 뇌물을 공여할 경우 기본 징역 2년 6개월~3년 6개월, 가중처벌시 3~5년에 해당한다. 감경해도 2년에서 3년 사이다. 형법상 집행유예는 3년 미만 징역에 적용할 수 있다. 수뢰자의 적극적인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하거나 소극적으로 가담할 경우 감경과 집행유예 사유에 해당한다.
집행유예 기준은 양형위원회가 정한 주요 긍정사유만 2개 이상 있거나 주요 긍정사유가 주요 부정사유보다 2개 이상 많을 때 권고된다. 이 부회장에게 적용될 수 있는 주요 긍정 참작사유는 ▲소극 가담 ▲수뢰자의 적극적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경우 ▲현저한 개전의 정(뉘우치는 마음) 등 3가지다. 피고인의 탄원서는 주로 현저한 개전의 정을 살펴볼 수 있는 참고자료로 쓰인다.
재판부는 새로운 감경 요소를 요구하고 있다. 이충윤 법무법인 해율 파트너 변호사는 “지난 재판에서 이미 양형 인자가 대부분 판단된 상황”이라며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거나 그간 부각되지 않았던 감경요소를 추가적으로 찾아보라는 의미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이번 파기환송심에서 빗발치는 탄원서가 재판부 심증에 미칠 영향은 미미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대법원 심리 당시 제출된 탄원서는 31개였지만 인정된 뇌물액은 1심 수준으로 늘었다. 1심 때는 27개, 2심에선 34개가 제출됐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은 “앞으로도 탄원서를 쓸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일반 사건의 경우 얘기가 달라진다. 변호인은 보통 의뢰인에게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탄원서 작성을 권유한다.
변호인은 의견서로 범죄 구성요건 탄핵을 시도한다. 새로운 법리해석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여기에 의뢰인과 주변인이 마음을 뒤흔들 반성문과 탄원서를 써낸다면 재판장 재량 범위에서 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같은 내용이어도 검찰 조서와 변론 요지서에 적힌 범죄 가담 경위보다 피고인의 손 글씨가 주는 효과는 다르다. 반성문과 탄원서가 증거로 쓰일 수 없지만 양형 고려 사유로 활용되는 이유다. 일단 펜을 들어야 한다.
정식 기록도 증거도 아니다 보니 탄원서는 양식도 분량도 따로 없다. 감정에 호소하는 읍소형이 있는가 하면 1~2줄짜리 문장이 편지 한 장을 반복해 채우기도 한다. 아들이 피고인인 경우 어머니가 쓰는 경우가 많다. 성범죄 사건에서 20대 남성 피고인의 어머니가 수차례 탄원서를 낸 끝에 실형에서 집행유예로 뒤집힌 경우가 있다. 변호사가 별 기대를 걸지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탄원서 작성을 권유하는 이유다.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식으로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는 글을 쓰기도 한다.
누구나 설득력 있는 탄원서를 쓰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변호인이 의뢰인 탄원서 작성을 돕는 경우가 많다. 익명을 요구한 변호사는 “탄원서 작성을 어려워 하는 의뢰인 가족에게 초안을 주는 경우가 있다”며 “변호인이 써준 글에 도장 찍거나 초안을 직접 옮겨 적으라고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논리로 먹고 사는 변호사가 글 솜씨를 조절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변호사가 쓴 티가 나지 않게 해야 한다”며 “법조인이 쓰는 용어를 날 것의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는 점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가장 힘이 센 탄원서는 피고인을 엄벌에 처해달라는 피해자 탄원서다. 이 경우 재판부가 무시하기 어렵다. 양형에 피해자와의 합의가 많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반면 피해자가 아닌 제3자 탄원서는 큰 효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탄원서 자체가 참고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탄원서의 효력은 ‘있다’ ‘없다’로 단정하기 어렵다. 죄명의 무게와 피해 정도,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 양형 요소 등이 뒤엉켜 굳어진 심증에 탄원서가 파고들 여지는 천차만별이다.
판사가 탄원서를 꼼꼼히 읽는지도 관건이다. 이미 사건기록과 재판기록 등이 방대하다 보니 참고자료에 불과한 탄원서까지 읽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판결문 양형 이유에 탄원서가 부각되지도 않는다. 피고인과 변호인 입장에서는 탄원서도 읽어주는 판사가 사건 배당 받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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