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918~1392)를 건국한지 1,100년이 됐다. 고려 건국 1,000주년 되는 해는 일제강점기 때라 기념할 수 없었지만, 1,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북한과의 관계와 맞물려 특별한 해로 다가온다.
고려가 민족의 통일로 새 나라를 열었듯이 지금의 한반도 또한 통일을 염원하는 격정의 시대를 맞고 있다.
고려는 하나 된 코리아의 출발이었고, 금속활자와 고려청자, 은 입사 청동 등은 통일의 정신으로 빚은 찬란한 물질문화의 결과물이었다.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은 단순한 유물의 나열을 너머 그 안에서 메시지를 찾아내고, 오늘날의 문화로 연결 지어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전시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이하여 고려 미술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을 내년 3월 3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4개국 11개 기관을 포함해 총 45개 기관이 소장한 국보 19건, 보물 33건을 포함한 고려 문화재 45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품의 규모와 질적인 면에서 광복 이후 고려 미술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최대규모의 특별전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은 지난 3일 기자간담회에서 "대고려전은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미래사회에서 민족사적인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으로 시작됐다" 며 "고려 문화가 가지는 가치 자체는 통일, 민족의 재통일이다. 태조 왕건이 분열된 후 삼국을 통일했듯이 그 통일이 지금의 우리한테도 화두이다"고 강조했다.
배 관장은 민족의 통일을 강조하며 이번 전시에서 스승과 제자 관계인 남한에 있는 희랑대사상과 북한에 있는 태조 왕건상을 한 곳에서 전시하기를 원했으나, 아쉽게도 이 만남은 불발됐다.
"이 시대에 희랑대사와 왕건이 만나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 주는 메시지가 얼마나 크고 우리의 염원을 잘 표현할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부분이다. 아쉽게도 태조 왕건상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올 거로 생각합니다. 지금 자리를 비워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빈자리가 통일을 향한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싶다."
이번 전시는 크게 4개의 이야기와 1개의 에필로그로 구성됐다.
1부는 고려의 수도 개경과 왕실 미술에 관한 이야기, 2부는 고려 사찰에 관한 이야기, 3부는 고려의 다점과 문인들의 발자취, 4부는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이다. 에필로그에서는 고려 기술의 정점으로써 금속활자가 다뤄진다.
▶1부, 수도 개경서 왕실 미술을 뽐내다
전시는 고려의 국제 무역항 벽란도에서 시작한다. 황해도 예성강 하류, 고려 수도인 개성과 가까운 벽란도는 수심이 깊어 배가 지나다니기 쉽고, 뱃길이 빨라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무역하러 고려에 왔고, 우리나라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벽란도에서의 국제 무역은 당시의 미술품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전시장에서 제일 처음 마주치는 유물은 '유리 주자'와 '청자 주머니 모양 주자', 그리고 황비장천이라고 쓰인 '거울'이다.
정명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는 "'유리 주자'는 지금도 이슬람 예배공간에서 성수를 담을 때 사용되고, '청자 주머니 모양 주자'는 북방의 유목 민족들이 먼 거리를 다닐 때 이용했던 가죽 물통의 형태를 모방해 만들었다" 며 "이러한 이국적인 물상들은 아마도 개경에 살았던 누군가의 식탁에서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춰 활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고려가 정체성을 형성하기까지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서적과 금석문들도 전시됐다. 고려는 황제의 나라를 자칭했고 궁중의 모든 면에서 천자에 따름이라고 자칭하는 자의식을 분명히 보인다.
전시된 '복녕궁주 왕씨 묘지명'에는 '천자의 따님이여 보름달 같으셨네'라는 글이 나오고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서는 고려 이전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통을 우리의 역사로 인식을 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던 신화도 우리 역사에 수록하게 됐다.
합천 해인사에 소장된 '역대연표'라는 목판에는 삼국 및 고려의 왕 이름과 연호를 나열돼 있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고려 시대에 하게 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경 지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려 탄생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희랑대사상과 태조 왕건상이 안치될 연화 문양 받침대가 전시됐다.
희랑대사는 통일신라 말에 이름이 높았던 화엄종의 승려로 후삼국의 분열기에 태조 왕건을 지지했다. 고려가 통일을 이룬 이후에는 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희랑대사상의 정식 명칭은 건칠희랑대사좌상(乾漆希朗大師坐像)으로 나무로 인물의 대략적인 형태를 만들고, 삼배나 모시와 같은 천에 칠을 여러 차례 해서 인물의 섬세한 형태를 만든 것이다.
정명희 학예사는 "스승과 제자의 상은 조성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언제가 되든 두 상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이 공간을 조성했다" 며 "고려에는 팔관회와 더불어 연등회라는 국가행사가 있었다. 연등회 절차 중에는 반드시 태조 왕건의 진전에 들려서 분향하고 제사를 올리는 절차가 기록돼있었다. 그 연등회 행렬을 모티브로 삼아서 희랑대사와 왕건, 스승과 제자의 1100년 만의 만남이 언제가 되든 반드시 이뤄지도록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희랑대사상 옆의 연꽃 모양의 받침대 위에는 북한에서 보유 중인 태조 왕건상을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1년 전 우리 쪽 요청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반응이 없어 결국 빈자리로 전시를 시작했다.
개경의 미술을 대표하는 것은 왕실 미술이다. 당시 최고 수준의 미술 후원자였던 왕실의 미술을 서긍의 스토리를 빌려 보여주는 공간이 마련됐다.
북송에서 20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끌고 고려에 온 서긍은 한 달간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을 '고려도경'이라는 책에 남기게 된다.
전시장에 나온 '고려도경'은 청나라 때 포정박이 편찬한 '지부족재총서'에 실린 판본이며, 1910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인쇄한 것이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여러 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라고 평가한 '청자 사자장식 향로'는 뛰어난 조형미와 청자 유액이 어우러져 고려 상형청자 가운데 수작으로 손꼽힌다.
'나전 대모 국화 넝쿨무늬 함'은 뚜껑과 물체의 옆면은 나전으로 국화 넝쿨무늬를 작식하고 뚜껑 윗면에는 얇게 저민 대모(거북 등껍질)로 장식했다. '청자 융머리장식 붓꽂이'는 붓을 보관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조형과 유색, 다양한 장식기법이 조화를 이룬다.
왕실의 부장품의 경우에도 당시 최고의 미술을 보여준다.
고려 제17대 임금인 인종의 장릉에서 나온 부장품으로 '청자 참외모양 병', '청자 합', '청자 뚜껑 잔', '청자 받침대', '청동 도장', '은제 숟가락과 청동 젓가락' 등이 전시됐다.
미국 보스턴박물관에서 온 '은제 금도금 주자와 받침'은 도자기에 이어서 고려 시대 공예의 절정을 보여주는 금속 공예품이다.
정명희 학예사는 "대나무의 모티브를 이용해서 죽순, 마디, 죽절 등으로 몸체를 만들고 뚜껑은 연꽃이 받쳐주고 있는 봉황 한 마리가 있다. 액체를 담고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주자가 은제 금도금으로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며 "이런 국내 미술을 향유하고 만들 수 있었던 인프라가 있었던 고려를 이 공간에서 느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물산의 집성지로써 개경을 보여주는 공간도 마련됐다. 수도 개경은 왕과 왕실, 중앙 관료 등 고려의 지배층 대다수가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이었고, 이들을 위해 대내외 최고급 물산이 이곳으로 집결했다.
전시장에는 청자 앵무무의 대접, 청자 연꽃무늬 대접, 청자 파도무늬 완, 중국 백자 대접, 중국 백자 새김무늬 대접, 중국 흑유 완, 거란 소자가 쓰인 거울 등이 전시됐다.
"개경에 살았던 귀족들은 청자는 고려의 것을 썼지만 중국의 각지에서 만들어진 식기류를 사용했다. 거울도 의례 도구에서 일상 물품이 됐다. 그래서 고려 거울뿐만 아니라 거란 거울, 송 거울 등 수입산 거울이 들어왔고, 다양한 소비 성향을 가진 고려 귀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장 한쪽 면에는 개성 인근에 있는 무덤에서 나온 다양한 옥석류와 장신구도 전시됐다.
옥, 수정, 석영, 유리 등 옥석류와 송나라에 들어온 다양한 목걸이들도 고려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됐다.
1부 마지막으로 전시된 것은 고려의 나전 향상이다. 향을 담았던 나전 향상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훼손됐지만, 일제강점기 정도에 그려졌을 모사도를 통해서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나전 향상은 반복적인 디자인 패턴이 아니라 물가 풍경에 버드나무가 휘날리고, 오리가 있고, 괴석이 있고, 하늘에 새가 나는 서정적인 풍경을 재현한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전이자 동아시아 공예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그래서 향후에도 과학적 정밀 조사를 통해 아직 밝혀지지 못한 고려 나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연구해 나갈 계획이다."
▶2부, 고려 사찰로 가는 길
고려 시대에는 불교와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이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이 가운데 국교라는 큰 지지기반에서 이룩한 불교 문화는 정점을 이루며, 이후 1,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다방면에서 찬란한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2부 '고려 사찰로 가는 길'에서 처음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대장경이다. 대장경은 단지 불교의 경전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인류가 모아놓은 지혜를 총집합한 지식의 여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대장경 판전에 들어갔을 때의 거대한 도서관 같은 느낌들을 재현했다. 경전에는 단지 불교의 교리나 사상뿐만 아니라 재산을 관리하는 법, 아플 때 약을 쓰는 법, 좋은 친구를 사귀는 법과 같은 불교가 전파되면서 만들어졌던 중요한 메시지들이 남겨졌다. 그러한 메시지는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2018년에 전달하고 싶었다."
고려가 찍은 첫 번째 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불교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송에서 만든 개보판 대장경을 원본 삼아 1011년부터 자체적으로 대장경을 목판에 새겨 간행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후 몽골 침입 때 경판은 구인사에서 화재로 소실됐고, 찍은 판들만 두루마리 형태로 전하고 있다.
대장경은 동아시아에서 외교적 주도권을 갖는 역할도 했다. 대장경을 보유한 국가는 그 대장경을 주변국에 나눠주면서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전시된 송나라 승려 정원의 '화엄경 주석서'는 의천(1011~1088)이 송에 유학을 갔을 때 스승이었던 정원이 화엄경을 쉽게 풀이한 책이다.
의천은 송나라 상인에게 이 책의 목판을 구해 고려로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일본이 끊임없이 고려 팔만대장경을 달라고 요청하자, 이 목판을 대신 보냈다고 한다. 이는 문화 유입에 있어 상인의 역할과 동아시아 삼국 불교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전 세계에서 9점 남아 있는 나전 경함 중의 한 점이 영국박물관으로부터 대여됐다.
'나전 국화 넝쿨무늬 경함'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함으로 얇게 깎은 조개를 이용해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졌다. 국화넝쿨무늬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질서정연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 단씩 꽃의 위치를 어긋나게 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과 함께 고래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는 팔만대장경은 나오지 않았지만, 팔만대장경보다 150년 앞선 1098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이 전시됐다.
전시장 중앙에는 지옥의 모습을 새긴 '시왕경 목판', 가장 오래된 '화엄경 목판', 화엄경의 장엄한 세계를 그림으로 새긴 목판이 모습을 보였다.
간송미술관에서 30년 만에 처음 나온 '금동삼존불감'도 흥미롭다. 불감은 개인이 사찰 이외의 장소에서 예불할 때 사용하는 부처를 모신 작은 집이다.
유물은 고려의 사원 건축을 충실히 재현한 불당 형태의 감실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어깨를 덮는 법의를 입고 허리가 다소 긴 비례의 불상은 요나라 불상과도 유사해 정치적 대립과 긴장 속에서도 문화적 교류를 이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천장에는 수천 개의 숯으로 만든, 불감을 재현한 설치작품이 마치 전각을 지나 사찰로 진입하는 공간으로 연출됐다. 여기서부터 불상과 불화를 만나는 본격적인 순례 여행이 시작된다.
전시장에는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건칠보살좌상, 금동아미타불좌상,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등 5구의 부처가 나란히 안치돼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낸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부처로 고려 시대 금동약사불로는 유일한 상이다. 또한 몸 안에서 10m가 넘은 길이의 발원문이 나왔다. 그 발원문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양 장곡사에 모여서 약사불을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교의 진리인 법을 인격화하여 형상화한 상이다. 왼손 주먹을 쥔 채 둘째 손가락을 세워 오른손으로 감싸 쥔 형태의 '지권인'은 지로자나불상만의 특징이다.
건칠보살좌상은 삼배나 모시에 옻칠한 후 여러 번 겹친 한 것을 건조해 만든 불상이다. 건칠불의 제작 전통은 송으로부터 왔으며, 이 상은 건칠 기법으로 제작된 보살좌상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크다.
금동아미타불좌상과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은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해주는 부처이다. 특히 문경 대승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불상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불상에서 1301년에 인출된 아미타삼존다라니가 발견됐다.
"불상을 만들 때는 굉장히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특히 양쪽 끝에 있는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과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은 700년 만에 첫 서울 나들이를 한 불상으로 고려 시대에 조성된 이후에 현재까지 사찰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숭배되고 있는 불상이다."
전시장에는 어렵게 대여해온 도난 불화가 총 7점 전시됐는데, 영국박물관에서 온 '수월관음도'가 그중에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 관음이 바위에 앉아 연꽃을 밟고 있다. 우리 수월관음도하면 뒤쪽에 대나무가 자라고 정면에 버드나무가 꽂혀 있는데, 도난 불화에서는 버드나무를 관음이 직접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도해가 됐다."
얼굴이 11개 손이 42수인 '십일면천수관음보살좌상'은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 시대의 천수 관음보살상이다.
작품은 원래 얼굴 1개에 하단에 5개, 중단에 4개, 상단에 1개의 작은 얼굴이 있다. 천수는 천 개의 손이라는 의미로 이 보살의 능력이 매우 다양함을 상징한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영국 영국박물관, 이탈리아 문화박물관에서 온 '아미타여래도'를 모아놓은 공간은 예배공간으로 재현됐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아미타불은 기도로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는 존재의 모습이다. 특히 이탈리아 문화박물관에서 온 '아미타여래도'는 기존에는 중국 불화로 알려지다가 201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를 통해서 고려 불화로 밝혀진 작품이다.
"사람들이 예배공간에서 수행의 결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아미타불일 수도 있고, 임종자를 맞이하여 서방정토로 인도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고려인들이 굉장히 사랑했던 늘 가까이 두고 싶었던 아미타불화의 아주 뛰어난 작품의 예이다."
불상을 조성하면서 그 안에 넣어두는 부장물을 불복장이라고 하는데, 종이를 비롯한 직물, 목함, 은 제품, 사리, 철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1301년 만들어진 아미타불상에 납입됐던 불복장 중에 '금박이 찍힌 주홍색 견직물'이 눈에 띈다.
붉은 천에는 창녕군부인 장씨라는 이름이 쓰여 있고, 그녀는 다음 생에는 화가로 태어나 불화를 그리거나 뛰어난 명의가 돼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싶다는 사연을 남기기도 했다.
유홍신이라는 재신을 지냈던 인물의 처 이씨 또한 아미타불상에 '흰 저고리 상의'를 넣어 죽은 남편의 영혼이 정토나 천상에 나도록 기원했다.
"이렇게 불상 안에 상스러운 물건을 납입하는 방식은 동북아시아에 공통된 문화지만, 직물을 납입하는 것은 고려의 굉장히 독특한 방식이고 아직도 수수께끼가 많다."
지옥과 극락의 세계를 다룬 불화도 흥미롭다.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조형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영역이다.
일본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온 시왕도인 제5 염라왕, 제7 태산왕, 제10 오도전륜왕 등이 전시됐다.
호림박물관 소장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은 두루마리 형식으로 글씨를 읽지 않고, 그림만 봐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사후에 왕을 만나고, 형벌을 받고, 그 신판의 결과와 마지막은 지옥에 한 명이라도 중생이 남아 있으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말한 지장보살의 이야기가 두루마리에 펼쳐진다. 아마도 이 두루마리를 펼치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을 것이다.
고려 사찰로 가는 길의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공간은 '새로운 기억'이라는 테마이다.
이곳은 각각 다른 공간에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통해서 들어온 유물들을 모아 놓은 공간이다.
이 중에는 2016년 한국 콜마에서 기증한 '수월관음도'와 '나전 모란넝쿨무늬 경함', '불감과 관음보살' 등이 있다.
▶3부, 차가 있는 공간 다점
3부에서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고려의 '다점'(茶店)을 형상화한 전시 공간이 나온다.
고려 시대의 다점은 마치 현대의 카페처럼 왕실 의례뿐만 아니라 불교 행사 또는 문인들이 모이는 열린 공간이었다.
전시장에는 어느 사찰 입구에 있었을 법한 다점의 경치, 향, 소리 등을 첨단 장치를 사용해 재현해 놨다.
다점의 왼쪽 공간은 차를 준비하기 위한 곳으로 차를 가는 맷돌이나 절구, 차들이 놓여있다. 오른쪽 공간은 차를 향유하는 공간으로 식탁과 의자, 찻잔 등이 전시됐다.
관람객들은 긴 의장 앉아 영상과 빛으로 만든 쇼를 보면서 아팠을 다리를 잠시 쉬게 할 수 있다.
다점 공간을 지나면 유교적 소양을 지닌 고려 지식인들의 발자취를 가늠할 수 있는 청자 동자 모양 연적, 청자 거북이 모양 연적, 청자 용머리 장식 붓꽂이 청자 사자 장식 베개, 한반도에 처음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초상', 원나라 국자감에서 성리학을 연구한 '이색초상' 등의 작품이 전시됐다.
▶4부,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
4부에서는 고려가 가지고 있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을 2018년의 시점에서 풀어본다.
청자가 가지고 있는 색, 금속공예가 가지고 있는 색, 재료에 대한 실험들이 도형적으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이를테면 청자의 붉은색을 입혀서 산화동으로 붉은 꽃이 피어나게 하는 기법이라든지, 도자기를 낮은 온도에서 소성한 다음에 금을 얹어서 화금청자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영국박물관에서 온 '청자 동채 모란 넝쿨무늬완'은 비취색 청자가 아닌 붉은색 청자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금속공예 기법의 정점인 타출 기법도 흥미롭다. 타출기법은 금속판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정을 두드려 마치 부조처럼 무늬가 튀어나오도록 한 장식 기법이다.
전시된 '은제 금도금 표주박 모양 병'에는 타출기법으로 봉황과 꽃이 이루고 있는 환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놨다.
고려인들은 금뿐만 아니라 은도 굉장히 좋아했다. 고려의 은입사 공예를 보여주는 작품도 전시됐다.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은 청동에다가 문양이 필요한 부분을 다 새긴 후에 홈을 만들어 은을 넣었다. 청동과 은의 색이 만들어내는 조화와 대비의 색깔들을 일상 집기에도 사용했던 고려의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에필로그, 고려 기술의 정점 금속활자
전시의 마지막 이야기는 고려 기술의 정점으로써 금속활자 이야기다.
개성 무덤에서 출토된 자전에도 나오지 않는 '산덩굴 복'자의 금속활자와 조선 전기의 '한글 금속활자'를 같이 전시했다.
"단순히 고려의 금속 활자가 구텐베르크보다 몇 년 앞섰다는 기록보다는 고려의 뛰어난 활자 인쇄 기술이 조선으로 이어지고, 금속을 녹여서 활자를 해야겠다는 아이디어의 시작은 분명히 무수한 시도와 실험을 거쳐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금속 활자 뒤편에는 1918년 촬영한 개성의 만월대 사진이 걸려 있다. 고려가 탄생한 918년과 1000년이 지난 1918년, 그리고 지금의 2018년의 메시지를 이 공간에 담았다.
"고려 건국 1,000주년 때는 일제강점기여서 기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번 전시를 기획하면서 고려가 준 선물이 뭘까? 하나 된 코리아의 출발이었을까? 아니면 찬란한 물질문화를 생산해 낸 저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일까? 과연 그 격동기의 시절에 500년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실마리를 이 전시를 보는 분들이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의도에서 이번 전시가 기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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