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등신의 까까머리 소녀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옆에는
코만 덩그러니 보이는 하얀색 강아지가 애교를 부린다. 어느날 개는 떠나가고 그 빈자리를 고양이가 채웠다. '갸르릉'하면서 꾹꾹이를 하는 고양이가 고마웠는지 소녀는 꽃을 들고 고양이를 희롱한다.
16일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만난 송진화 작가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줬는데 어미 고양이가 새끼고양이 다섯 마리를 데리고 왔다" 며 "계속 밥을 줬는데 다 나가고 한 마리만 남아 있다. 지금은 친해져서 꾹꾹이를 해준다"고 말하며 웃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송진화 작가가 3년간 나무로 깎은 소녀와 개, 고양이 등 총 25점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개인전 'Here and Now'가 이달 17일부터 9월 19일까지 열리는 것.
1985년 세종대학교 회화과(동양화)를 졸업한 송진화 작가는 7년 후인 2002년 첫 개인전을 열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2006년 동양화를 뒤로하고 험난한 조각에 발을 들인다.
송 작가는 "80년대 초부터 동양화란 무엇인가?가 화두가 됐다. 마음은 그림을 하려고 했는데 여전히 동양화가 뭔지 잘 몰랐다" 며 "서양화 기법으로 한지에다만 그린다고 동양화일까? 그런 의문들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동양화가 재미없었고, 가슴속의 답답함은 점점 커졌다. 자연스럽게 조각에서 길을 찾았다.
"기질이나 성향 자체가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게 맞더라고요. 일정 부분 후벼파니까 스트레스도 풀리고 마음이 시원해졌다."
이번 'Here and Now'전은 2015년 '너에게로 가는 길'전과 큰 차이점이 있다. 2015년 전시에서는 '식칼' '도끼' 등의 소재를 등장시켜 강렬함을 줬다면, 이번 전시는 힘이 빠진 편안한 느낌을 준다.
송 작가는 "지랄도 할 만큼 하면 해소되니까 그런 것 같다. 뽑아냈다고 해야 하나 많이 내보냈다" 며 "죽을 때까지 식칼만 들고 있고 뻥 뚫려있고 그러면 그것도 너무 힘들다"고 말하며 웃었다.
더욱이 송 작가는 최근에 하나 있는 딸을 결혼시키고 인생의 책무를 다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묵직한 느낌을 주는 몇 작품도 전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여인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뜨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지만, 손은 온 힘을 주고 있어 기괴하게 꺾여있고 날카롭게 보인다. 더욱이 가슴은 뻥 뚫려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수고하고 짐진 자' 작품은 대 놓고 힘든 표정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자기 몸보다 더 큰 짐을 지고, 개처럼 혀를 내밀고 있다. 손 역시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다.
▶재료로 참죽나무, 소나무를 좋아하는 이유
송진화 작가는 주로 소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참죽나무, 향나무 등을 사용해 조각한다.
대체로 나무의 거친 표면을 부각하기 보다는 단아하게 다듬는 방법을 택했다.
특히 여인상의 얼굴 부분은 매끈하게 윤기가 나도록 표현했다.
완벽하게 다듬는 방식을 선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울퉁불퉁한 나무의 결을 극대화해 표현하거나 면적인 요소를 강조하여 깎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송 작가는 "참죽나무와 소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소나무를 깎아놓으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나이테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며 "참죽나무는 색깔이 진해서 센 조각에 많이 쓴다. 참죽나무는 칼을 날카롭게 갈지 않아도 단단하기 때문에 원하는 데로 끊어진다. 칼로 칠 때 끊어지면서 튕겨 나가는 느낌이 좋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 작품 중에는 갈라지거나 터진 작품이 유난히 많다. 하지만 그런 틈들이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마치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이번에 달라진 게 터진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이다. 특히 소나무가 잘 터지는데 전에는 온갖 방법을 다해가면서 계속 메꿔왔지만 지금은 아예 확 드러내서 시원하게 작업한다."
▶재룟값 0원..머리는 피가 말라붙은 색
송 작가는 재룟값을 걱정하지 않는다. 사서 쓰는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작품들은 이전에 누구의 집이었다거나 쓸모없어서 놀이터 등지에 버려진 나무이다.
물감은 투명 착색제인 스테인(stain)과 먹을 주로 쓴다. 나이테가 예쁘게 나온 작품은 얇게 비치게 물감을 쓰고, 은행나무나 결이 없는 재료는 색을 화려하게 쓴다.
작품에서 옷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입고 있지만, 머리는 항상 빨간색을 쓴다.
송 작가는 "처음에는 청색, 녹색, 검은색 등 여러 색을 해봤는데 빨간색이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을 제일 대변해주는 색인 것 같다. 피가 말라붙은 색"이라고 강조했다.
남자를 조각한 작품이 전혀 없는 것은 작품 자체가 본인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일기를 쓰는 것처럼 기분 좋으면 이런 애 만들고 깔리면 저런 애도 만든다. 그런 식으로 일기 쓰는 형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굳이 남자가 필요 없다."
전시 작품에서 대부분 코와 입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간혹 입이 있는 작품도 있지만 코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동물을 표현할 때는 항상 코가 있고 입이 없다.
송 작가는 "눈만으로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코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만들겠다고 생각도 못 했다" 며 "코가 없는지 인식도 못 했다. 2012년도에 누가 얘기해줘서 알았다"고 말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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