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10년째 표류하는 GBC, 현대건설의 '침묵 리스크'가 실적을 옥죈다

한석진 기자 2025-11-20 09:00:00
초기 105층 계획은 사실상 무산… 저층 복합개발로 축소 검토 장기 지연 여파, 자금 고착·매출 공백·사업성 재산정 필요성 제기
현대건설 계동 사옥. [사진=현대건설]

[이코노믹데일리] 2014년 현대차그룹이 10조5500억원에 매입한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개발사업(Global Business Center·GBC)이 10년째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 “향후 50년 매출을 책임질 랜드마크”라는 기대 속에 추진된 초고층 복합개발은 105층 계획이 무산된 데 이어 저층 복합개발로 재검토되는 상황이다. 고(故) 정몽구 명예회장의 숙원이자 정의선 회장이 강조한 ‘뉴 현대’의 상징 프로젝트는 이제 “오너리스크의 대표 사례”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GBC 지연은 현대건설의 재무, 사업, 평판 전반에 복합적인 부담을 초래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금 고착이다. 현대건설은 현대차, 기아와 함께 부지 매입 단계에서 10조원대 자금을 투입했다. 시공사로서 장기 매출 회수를 기대했지만 공사가 사실상 중단되며 자금 회전은 멈춰 섰다. 대형 프로젝트 참여 여력은 물론 차기 투자 판단에도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

 

매출 공백도 뚜렷하다. 장기 건설 프로젝트는 공정률에 따라 매출이 반영되지만 GBC는 공정률이 5% 수준에 머무르면서 실질 매출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사업 규모가 단일 사업 기준 5조~6조원대로 평가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장기 실적 기반이 통째로 미뤄진 셈이다.
 

사업비 급증 가능성은 또 다른 부담이다. 2016년 약 2조원으로 추산되던 사업비는 인플레이션, 설계 변경, 인건비 상승 등이 반영되며 5조원 이상으로 증액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설계 변경 과정에서 발생한 용역 비용 역시 회수 불가능한 매몰 비용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 수익성 계산식 자체를 다시 세워야 하는 상황이다.
 

현대건설의 실적 흐름도 녹록지 않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은 5342억원으로 연간 목표치(1조1828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매출이 23조원을 넘겼음에도 영업이익률은 2.32%로 낮았다. 지난해 현대엔지니어링 해외사업 손실로 1조원대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 폴란드 본드콜, 인도네시아 발릭파판 플랜트 등 해외사업 리스크도 이어지고 있다.
 

시장 신뢰도는 떨어지고 있다. 증권가는 “GBC는 한때 현대건설 주가의 기대 요인이었지만 지금은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NICE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는 현대건설 분석자료에서 GBC와 부동산 PF 관련 우발채무를 핵심 리스크로 반복 명시했다. 오너의 전략 결정 지연이 재무 리스크로 전이되는 상황이라는 해석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GBC 지연의 본질을 놓고 시장에선 “정의선 회장의 우선순위 변화가 핵심 변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 회장은 취임 이후 전동화, UAM, 로봇, AI 등 미래 모빌리티 중심 전략을 강화하며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편했다. 본격적인 그룹 R&D 중심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GBC는 “하드웨어적 유산”으로 분류되며 후순위로 밀린 것으로 풀이된다. GBC의 저층 개발 검토 역시 “미래 기술 투자 우선”이라는 전략적 판단이 반영된 조치라는 분석이 나온다.
 

문제는 방향성보다 실행 방식이라는 지적이 이어진다. 사업 축소나 일정 재조정이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명확한 기준 제시 없이 지연만 반복될 경우 시장 불확실성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대형 프로젝트의 가장 큰 비용은 착수비가 아니라 지연에 따른 신뢰 손실”이라고 말했다.
 

GBC 논란은 그룹 지배구조 문제와도 연결된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를 유지하고 있으며, 상속과 지배력 문제는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평가다. GBC 매입 당시 현대건설이 대규모 자금을 분담한 점을 두고 주주들 사이에서 “그룹 의사결정에 끌려갔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시장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향후 사업 방향에 대한 분명한 기준과 실행 계획이다. GBC의 최종 규모와 설계 방향뿐 아니라 결정 시점과 절차, 단계별 일정이 제시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추진 방식, 자금 계획, 위험관리 기준 등을 명확히 공표할 경우 사업 안정성 검토와 시장 평가가 보다 합리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GBC는 현대건설의 기업가치뿐 아니라 정의선 회장의 경영 철학과 리더십도 평가받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전략적 불확실성”이라는 족쇄를 끊고 본연의 경쟁력을 증명할 수 있을지가 향후 최대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