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자수첩]이건희의 '배반', 배반당한 유언들

임효진 기자 2025-02-24 17:32:51
반도체 사업·프랑크푸르트 선언…혁신은 곧 배반
[산업부 임효진 기자]
[이코노믹데일리] 삼성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다. 고(故) 이병철 초대 회장은 스스로를 배반하며 성장했다.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제조업에서 전기·전자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배반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도 아버지의 삼성을 배반하며 성장했다. 

반도체 사업은 아버지 삼성에 대한 첫 번째 배반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실리콘 밸리 유학 후 돌아와 1974년부터 반도체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이병철 회장에게 한국반도체 인수를 제안했지만 거절 당했고 사재로 인수했다. 취임 직후인 1988년에는 그 후신인 삼성반도체통신을 삼성전자에 합병시켰다.

두 번째 배반은 일명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불리는 제2창업 선언이었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사장단과 임원 전원을 불러 모아 놓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상징적인 말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부정했다. 양산에서 품질로, 가전제품에서 반도체·스마트폰으로, 경직된 조직 문화는 유연한 조직 문화로 말 그대로 싹 다 바꿨다. 

배반은 혁신의 다른 이름이다. 혁신은 언젠가 결국 배반당할 운명에 처한다. 혁신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혁신은 새로운 혁신에 자리를 내줘야 할 숙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유언이 배반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현재 삼성의 배반은 또 다른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배반에 대한 배반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부문에서 경쟁 기업 대비 낮은 수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에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 1위 자리를 내줬다. 

최근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가 기술 개발을 막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얼마 전 국회에서 반도체 산업 연구직들에 대한 ‘주 52시간 예외 적용’을 두고 여야가 입장 차이를 보인 가운데 반도체 기업 경영진과 현장 직원도 입장 차를 보이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삼성의 배반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처럼 이건희의 삼성을 배반하지 않는 것은 이건희의 삼성을 배반하는 것이고, 앞으로 이건희의 삼성을 배반하는 것도 결국 이건희의 삼성을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삼성에게는 지금이 배반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