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인천에서 발생한 메르세데스-벤츠 전기차 화재 사건이 '전기차 배터리 게이트'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고를 일으킨 메르세데스-벤츠 EQE에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중국 파라시스 배터리가 탑재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번 화재 사고로 소비자를 기만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크리스토프 스타진스키 메르세데스-벤츠 부사장이 지난 2022년 "EQE에 탑재되는 베터리 셀은 중국 CATL이 공급한다"고 밝혔으나 거짓말인 게 들통 났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8일 불이 난 차량 말고도 파라시스 배터리가 탑재된 메르세데스-벤츠 EQE가 3000여대 더 있다고 발표했다.
스타진스키 부사장의 당시 발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 기자단 요청으로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나왔다. 그는 해당 인터뷰에서 "안전성과 품질에 대한 보증은 모두 벤츠가 담당하기 때문에 배터리 셀 공급 업체에 대해 소비자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인천 화재 사고 이후에도 배터리 제조사를 문의하는 소비자들에게 "알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보배드림을 비롯한 온라인 자동차 커뮤니티에는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고객센터와 통화한 내용을 인증한 글이 이어졌다.
제조사 정보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깜깜이 배터리'는 메르세데스-벤츠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에서 영업 중인 전기차 제조사 대부분은 자사 차량에 들어간 배터리 제조사와 원산지를 사전에 고지하지 않는다. 일부 전기차 제조사는 차량 소개 보도자료에 배터리 제조사를 명시하거나 소비자 문의가 있을 때에 한해 어느 회사 배터리가 차량에 들어가는지 알려준다.
그러는 사이 메르세데스-벤츠 EQE 화재가 발생했고 소비자들 사이에선 "어느 제조사의 배터리가 내 차에 들어갔는지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전기차 제조사를 향한 불신은 잇따른 화재와 맞물려 '전기차 포비아'를 확산시켰다.
자동차 제조사가 거짓말을 했다가 문제가 된 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독일 완성차 기업 폭스바겐이 일으킨 2015년 '디젤 게이트'와 2018년 BMW 경유차 연쇄 화재 사건이 대표적이다.
폭스바겐은 2005년부터 '클린 디젤'을 앞세워 경유차 전성시대를 열었으나 배출가스의 양을 조작했다는 사실이 발각돼 홍역을 치렀다. 소프트웨어를 통해 배출가스 시험을 할 땐 차량에서 오염물질이 덜 나오도록 꼼수를 썼다. 이 사건으로 폭스바겐그룹은 대규모 리콜(결함 시정)과 벌금으로 한화 100조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BMW는 2018년 무렵 발생한 차량 화재의 원인이 부품 설계 결함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은폐했다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불이 난 차량은 대부분 경유차인 520d였다. 같은 해 이뤄진 민·관 합동 조사 결과 화재 원인은 배출가스 재순환장치(EGR) 설계 결함이었다.
당시 주행 중인 차는 물론 주차된 차량에서도 화재가 일어나면서 해당 차량의 주차장 진입을 막는 'BMW 포비아'가 나타나기도 했다.
완성차 업계에선 이번 메르세데스-벤츠 전기차 화재 사건이 앞선 폭스바겐·BMW 사태처럼 '전기차 배터리 게이트'로 확산할 가능성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업계 한 관계자는 "메르세데스-벤츠가 국내에 차량을 출시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은 있다"면서 "브랜드를 향한 불신으로 인해 전기차 캐즘(일시적 정체) 상황이 길어질까 염려되는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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