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월남에서 온 유령···F-4 팬텀 55년 임무 마친다

유환 기자 2024-03-14 06:00:00
베트남 철군과 신형 전투기 맞바꿔 대형 전투기로 활약하며 55년간 활동 신형 전투기에 임무 넘겨주고 6월 퇴역
지난 8일 공군 수원기지에서 F-4E 팬텀이 엘리펀트 워크(Elephant Walk)' 훈련을 진행하는 모습. 이날 훈련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지상 F-4E 3대와 공중 F-35A 2대 등 총 30여대가 참여했다. [사진=공군]
[이코노믹데일리] 월남에서 온 유령이 우리 곁을 떠난다. 55년간 한반도 하늘을 누비던 'F-4 팬텀(Phantom)'이 올 6월 퇴역을 앞두고 있다.

지난 8일 공군 수원기지에서 '엘리펀트 워크(Elephant Walk) 훈련'이 진행됐다. 엘리펀트 워크 훈련은 항공기를 최대로 무장시킨 후 밀집 대형으로 지상을 활주하는 훈련이다. 기지의 군수 능력과 관제 능력을 점검하는 훈련이지만 실질적으로 중무장 항공기 다수를 보여줘 전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다만 이번 훈련은 조금 특별했다. 공군에선 팬텀을 가장 앞세우고 뒤이어 F-15K, F-35A 등 최신 기종을 배치했다. 퇴역을 앞두고 사실상 고별식을 한 것이다. 공군은 "F-4E가 모든 전투기의 '큰형님' 격"이라며 "명예로운 은퇴를 축하하는 의미를 더했다"고 설명했다.

초기 모델인 F-4D는 이미 전량 퇴역했고 이번에 퇴역하는 건 남아있는 F-4E 10여대다. 도입의 계기가 된 베트남 전쟁부터 앞으로 한반도 하늘을 지켜줄 후속 기종까지 짚어보며 노장의 일대기를 살펴봤다.

◆월남에서 흘린 피로 얻은 전투기
F-4는 혈·세(血·稅)로 얻은 전투기다. 비유적인 수사가 아니라 정말 한국군의 피와 국민의 성금으로 사 올 수 있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1960년대 도입이 이뤄질 당시 상황을 봐야 한다.

F-4는 1950년대 시험 비행을 마친 이후 1964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공산권의 경쟁 기종이었던 미그(Mig)-21과 비교해 보면 최고 속도와 탑재 중량에서 우위에 있는 최신형·고성능 기종이었다.

1960년대 북한의 공군 전력은 남한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북한은 전투기 150여대를 보유하고 촘촘한 방공망을 구축해 둔 상태였다. 남한은 북한의 절반밖에 안 되는 F-5 프리덤 파이터와 F-86 세이버로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F-4 도입이 급물살을 탄 건 1968년 대형 사건이 연달아 터졌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박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1·21 사태가 터지고 이틀 후인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 함정이 납치된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이 발생했다.

한반도에서 전면전 분위기가 고조되자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과 F-4 도입을 위한 협상 카드로 이어졌다. 미국은 한국군 5만여명이 이탈하는 게 부담스러웠고 이듬해인 1969년 무상 임대 형식으로 F-4D를 18대 제공했다.
 
지난 8일 수원기지에서 '24 자유의 방패(FS·Freedom Shield) 연습과 연계해 엘리펀트 워크(Elephant Walk)' 훈련이 진행됐다. 공군 전투기의 '큰형님'격인 F-4E 팬텀(Phantom)의 퇴역을 앞두고, F-4E를 필두로 30여 대의 공군 전투기들이 압도적 공군력을 과시했다. [사진=공군]
미국은 베트남전이 끝난 후 F-4D의 반납을 요구했는데 전력 공백을 우려한 정부는 국민 성금으로 1975년 반납기 18대 중 5대를 중고 구매했다. 이게 '방위성금 헌납기'이며 '필승 편대'로 불렸다. 또 1973년까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누계 기준 약 30만명, 사상자는 총 5099명이다.

◆한반도 공군력 격차 뒤집은 주역으로

덕분에 한국은 미국·영국·이란에 이어 세계 4번째로 F-4를 도입한 국가가 됐다. 미국의 핵심 우방이었던 일본이나 서독보다 빨랐다. 지금으로 치면 미군의 F-22나 F-35를 미 우방 중에서 가장 빠르게 도입한 격이다.

이후 F-4는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기관포가 없어 베트남전에서 애를 먹긴 했지만 한반도에선 적수가 없었다. F-4가 수원기지에 배치된 이후 북한에서 전투기를 동원해 무력도발 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공군에선 첫 도입 이후 수량을 계속 늘려 한때 220여대의 F-4를 운용했다. 기체와 무장 개선 작업도 꾸준히 이뤄져 F-4E 계열 도입과 'AGM-142 팝아이 미사일' 장착이 이뤄졌다. F-4의 폭장량은 8톤(t) 내외인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B-29 폭격기와 비슷한 수준이다.

특히 팝아이 미사일은 북한이 두려워했던 F-4의 핵심 무장이다. 1985년 이스라엘 라파엘사와 미국의 록히드마틴이 공동 개발했으며 최대 사거리 100km, 오차범위 1m의 정밀타격 무기다. 340~360kg에 이르는 탄두로 1.6m 두께 철근 콘크리트를 관통할 수 있다. 팝아이를 영어로 발음하면 뽀빠이와 비슷해 '뽀빠이 미사일'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엔 공군이 북한의 벙커와 핵시설을 정밀 타격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었다. 1360kg에 이르는 중량을 감당할 수 있는 전투기가 드물어 F-4가 투발 수단이 돼 1990년대까지 활발히 운용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F-16이 도입됐지만 F-4는 고유의 역할을 하며 자리를 지켰다. 

◆F-4 전력 공백 막아줄 후배들, F-15K, F-35A

F-4는 도입된 지 30여년이 넘어가며 자리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중반 1차 차기전투기(FX)사업을 통해 F-15K가 들어오면서 고중량·대형 항공무기 발사 플랫폼 자리를 넘겨줬다.
 
훈련에 참가한 F-15K가 대구기지에서 힘차게 이륙하고 있는 모습 [사진=공군]
F-15K는 미국 F-15E를 기반으로 한 전투기다. 공대공과 공대지 모두 가능한 전투기로 현재 공군 주력 전투기다. 13t에 이르는 무장을 탑재할 수 있으며 전투 반경이 2000km에 달해 후방에서도 한반도 전역을 담당할 수 있다.

정밀 타격 무기론 팝아이를 '타우러스'가 이어받았다. 독일에서 만든 순항 미사일로 480kg 탄두로 철근 콘크리트를 5m 이상 관통할 수 있다. 최대 사거리 500km, 오차범위는 1~2m이며 북한의 핵심 시설과 지휘부가 주요 목표물이다.
 
훈련에 참가한 미 공군 F-35A가 오산기지에서 힘차게 이륙하고 있는 모습 [사진=공군]
2018년 3차 FX사업으로 들어온 F-35도 정밀 타격 임무를 이어간다. F-35는 스텔스 전투기로 적 레이더에 쉽게 걸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무기를 장착하는 무장창을 내부에 둬 스텔스 성능을 강화했는데 레이더상 크기가 F-15K 100분의 1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텔스기는 은밀하게 적진 깊숙이 침투해 주요 전략 시설에 폭격 후 복귀할 수 있다. 표적을 빠르게 추적하는 전자광학 추적 시스템(EOTS)부터 360도로 주야간 감시가 가능한 분산형 개구 장치(EO-DAS)까지 첨단 기술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F-15K와 F-35은 다방면에서 공군의 핵심 전력으로 활용되고 있다. 킬체인에선 북한의 공격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고 나서 선제 타격을 할 때의 핵심 공격 수단이다. 고성능 레이더를 이용해 북한의 동태를 감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