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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감정 호소하는 탄원서, AI 재판되면…

이범종 기자 2019-11-22 10:11:00
법원행정처, AI 활용방안 연구 용역…AI 보조 판사 성큼 탄원서 가슴으로 읽어줄 판사는 기계 아닌 사람 학계 “AI 도입 전 유전무죄・전관예우 답습 예방해야”

서울 서초동 법원 종합청사 내부. [사진=이범종 기자]

[데일리동방] 재벌 봐주기 판결이라는 오명을 쓴 법원이 인공지능(AI)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서초동에서는 객관성에 대한 기대와 인간 판사 영역에 관한 고민이 교차한다.

그 중 하나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빗발치는 ‘탄원서’다. 법조계에서는 사람 마음 움직이기 위한 탄원서 만큼은 기계의 영역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AI 도입에 앞서 실명 판결문 공개로 유전무죄 가능성을 줄여놔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고등법원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공여 파기환송심에 제출된 탄원서는 20일 기준 19건이다. 탄원서는 피고인 본인이 아닌 가족이나 피해자, 제3자 등이 양식과 분량 제한 없이 써낼 수 있다. 이 부회장 변호인단은 탄원서를 준비하지 않을 방침이다.

탄원서는 정식 증거나 증언이 될 수 없는 참고자료다. 담당 판사가 꼼꼼히 읽는지도 알 수 없다. 특히 이번 재판의 경우 나올 수 있는 감형요소는 이미 다 나온 상태라는 것이 법조계 중론이다. 게다가 탄원서는 주관으로 시작해 확신으로 끝나는 글이다 보니 사실상 ‘한풀이’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오성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탄원서는 보통 양측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의 감정이 들어간 글이므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며 “고소인이 피고소인 처벌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합의 진행이나 사과도 없었다는 사실 등 사실확인서 기능은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재판은 승소한다는 보장이 없어도 상대방을 법정에 불러 하고픈 말을 하려는 한풀이 기능도 한다”며 “탄원서 역시 재판에 영향이 크지 않다는 점을 알면서도 재판부에 한 마디라도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잘 것 같아 제출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탄원서는 법관과 사람 대 사람으로 이해 받고 싶어하는 감정을 반영한다는 설명이다.

◆법원 불신 깊다지만…"탄원서는 사람이 읽어야"

사람 판사는 기대와 불신을 한 몸에 받는다. 법원은 지난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심 판결 이후 ‘재벌 3・5 법칙’이 반복됐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재벌 형사재판은 1심 때 5년형, 2심 때 3년형 이하를 선고받아 집행유예로 풀려나곤 한다는 국민적 의심이다. 1심 형량이 항간에 떠도는 법칙에 그대로 들어맞지는 않는다. 죄명과 양형 기준에 따라 형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부회장은 1심에서 징역 5년, 2심 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현행법상 집행유예는 3년형 이하에 선고할 수 있다. 법원에 대한 불신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깊어진 상태다. 양 전 대법원장 1심은 현재 진행중이다.

이에 실명 판결문 공개와 기계학습을 통한 AI 보조판사 도입이 학계에서 꾸준히 거론돼왔다. 사법부는 실명 판결문 공개를 막는 대신 자체적으로 AI 도입에 나서고 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지난달 10일 ‘사법부에서의 AI 활용방안 정책연구용역’을 공고했다. AI로 법관 업무를 지원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법원행정처는 제안요청서에서 “재판 진행, 판결 작성 등에서 AI를 재판보조도구로 잘 활용할 경우 법관의 업무부담을 경감하고 재판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사업 배경을 밝혔다. 그간 학계에서는 법원이 개인정보를 이유로 실명 판결문이 공개되지 않아 데이터 구축이 힘들다고 지적해왔다. 이에 사법부 스스로 관련 데이터를 구축해 AI 활용 체제를 세운다는 설명이다. 사업은 6개월 간 예산 3000만원이 투입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대법원은 차세대 전자소송시스템 구축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사업 일부인 ‘지능형 법관업무지원’에도 법원이 가진 데이터로 사법정보 빅데이터 플랫폼을 만들어 활용하는 방안이 들어있다. 이를 기반으로 지능형 사건처리 지원(화해조정)과 쟁점 분석, 판결문 초고 작성 등 단계별로 AI를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두고 판결문 초고 작성 과정에서 AI 판사가 탄원서를 참고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변호사들은 AI 판사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다는 반응이다. AI판사는 탄원서에 드러나는 양형인자를 수치화해 법원 양형 기준에 적용하는 반면, 사람은 탄원서에 드러난 진정성을 바탕으로 재량 범위 안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AI 판사가 공소장부터 재판 내용 등을 학습해 탄원서 내용의 진위를 가리는 방법을 검토해보자는 제안이 나온다. 강장묵 글로벌사이버대 AI융합학과 교수는 “AI 판사가 먼저 탄원서를 읽고 팩트체크 한 뒤 진위 의심 근거를 항목별로 나열한 문서를 첨부해 인간 법관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강 교수는 2017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가짜뉴스 찾기 AI R&D 챌린지’에서 장관상을 수상한 이후 관련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반면 주관적인 글 특성상 기계가 분석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안선영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피해자가 제출하는 탄원서에는 공소사실 관련 내용이 있긴 하지만 감정적인 요소가 더 강하다”며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 역시 공소사실보다는 감정적인 내용이 많아 AI 판사가 진위를 검토해 인간 법관에게 전하는 일은 불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기계 오류 가능성도 거론된다. 만에 하나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충윤 법무법인 해율 파트너 변호사는 “일부 표현이 동일하더라도 전체 문서 취지에서 아 다르고 어 다른 만큼 사람이 판단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며 “AI 판사가 재판을 맡더라도 기본적으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하고, 법관의 양심과 그에 따른 판단, 그에 이은 책임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이른바 ‘알파고 판사’에게 재판을 맡길 수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판결문 공개로 ‘인간' 판사 불신 해소부터

근본적으로는 법원 내부에서 도입하는 AI가 그간의 잘못된 판단마저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려된다. 미국의 재범 예측 서비스 COMPAS는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돼 위스콘신주 대법원이 해당 보고서 외에 위험성 점수에 관한 독립적 양형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제안요청서에 이 사례를 넣고 재범 예측 서비스를 활용할 경우 민사 소액 재판처럼 윤리적・법적 논란 가능성이 적은 분야를 발굴해야 한다고 적었다.

학계에서는 ‘유전무죄’ 판결 방지를 위해 법원 밖으로 실명 판결문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 내부에서 AI 서비스를 준비할 경우 데이터 학습 과정에서 그간 인간 판사가 내린 판단을 답습해 과거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AI가 판결문 데이터로 기계학습 하는 과정에서 어느 판사가 누구의 사건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확인하고 편향성을 중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박 교수는 이 작업을 법원 내부가 아닌 밖에서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기업이든 학계든 방대한 판결문 데이터를 분석해 실제 편향성 유무를 확인하고 기계학습 과정에서 편견을 걸러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1월부터 대법원 누리집에서 비실명 판결문을 열람할 수 있지만 건당 1000원을 내야 한다. 피고인 소득에 따른 판결 방향 등 외부에서 기계학습으로 분석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