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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진의 법과 철근] "선투입 후계약이 만든 그림자…건설현장이 안고 있는 구조적 위험"

한석진 기자 2025-11-20 08:19:09
한석진 기자
[이코노믹데일리] 건설현장에서 “지금 멈추면 수십억이 날아간다. 일단 투입하고 그다음에 서류 맞추자”는 말은 낯설지 않다. 이번 동아건설산업 하도급법 위반 적발은 이 오래된 관행이 여전히 현장을 지배하고 있음을 다시 보여준다. 하도급 계약서를 공사 전에 교부해야 한다는 법적 원칙은 분명하지만 도시개발사업과 대형 프로젝트에서는 설계 변경과 공정 압박이 반복되고 계약 절차가 뒤따르는 방식이 사실상 일상처럼 굳어졌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단순 위반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대규모 사업에서는 민원·입주자 요구·설계 변경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공정이 지연되면 수십억의 비용이 즉시 발생하기 때문에 현장은 계약서보다 공정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원사업자는 “일단 진행하라”는 지시를 하고 수급사업자는 위험을 떠안은 채 공사를 시작한다. 대금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를 진행하는 위험은 결국 약자인 수급사업자의 몫이 된다.
 

공정위는 30년 넘게 같은 문제를 지적해 왔다. 법도 있고 매뉴얼도 있으며 판례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공정은 늘 급하고, 원·하도급 간 힘의 균형은 깨져 있으며, 본사와 현장은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갖고 움직인다. 본사는 절차를 강조하지만 현장은 공정을 멈출 수 없고, 이 간극이 ‘선투입 후계약’을 계속 재생산한다.
 

그러나 지금의 건설환경은 더 이상 이런 관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공사비는 오르고 PF 자금 조달은 어렵고 기업들의 재무여력도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약 리스크를 방치하면 현장은 멈추고 프로젝트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이번 공정위 제재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건설산업 전반의 리스크 관리 능력이 뒤처지고 있다는 경고에 가깝다.
 

해법은 새로운 규제가 아니다. 이미 충분한 법이 있다. 필요한 것은 기술과 절차 그리고 구조의 변화다. 변경공사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계약 절차가 연동되는 시스템, 공정관리와 계약관리를 동시에 운영하는 통합체계, 불가피한 선투입 공정에 대한 표준화된 절차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규정은 이미 존재하며, 문제는 실행과 의지의 부족이다.

 

건설업은 결국 신뢰를 기반으로 성립한다. 계약이 무너지면 신뢰도 무너진다. 이번 사례는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전체에 던지는 신호다.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위험을 정상화해온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바꾸기 위해선 불편함을 감수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 오래된 관행을 끊어내지 못하면 다음 문제는 특정 기업의 사건이 아니라 건설산업 전체의 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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