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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데스크칼럼] 국뽕 입틀막 그리고 수원빵

서윤경 산업부장 2024-08-02 18:17:29
서윤경 산업부장
[이코노믹데일리] “기자님, 대한민국 국민이잖아요.”
 
지난 2012년 삼성전자 보도자료를 받고 그 내용을 확인하던 중 삼성 관계자에게 들은 말이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말이 기억나는 걸 보면 꽤 인상 깊었던 듯 싶다. 그 날 만큼은 그 말이 유독 '압박'으로 느껴졌으니 그럴 법도 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1년 넘게 애플과 ‘세기의 특허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밀어서 잠금해제’‘둥근 모서리’ 등의 단어들로 대표되던 특허 소송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 특허 전쟁은 2011년 4월 애플이 삼성전자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와 태블릿PC인 갤럭시탭이 디자인 등 특허를 침해했다며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법원에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일주일 뒤 삼성전자도 한국과 독일, 일본에 고속패킷전송방식(HSPA) 등 통신표준 특허 위주로 애플이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제소하면서 맞불을 놨다.
 
이후 소송은 복잡하게 흘러갔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호주, 프랑스 등으로 소송 무대는 넓어졌고 각 나라에 서로의 제품을 못 팔게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전 세계 9개국에서 50여건의 특허소송이 동시다발로 진행되니 최소 2∼3년은 걸린다는 전망도 나왔다.

여기에 아이폰 전면(前面) 디자인(특허번호 678), 중첩된 반투명 이미지(특허번호 922), 손가락 2개를 이용해 화면을 키우거나 줄이는 핀치 투 줌(특허번호 915), 손가락을 비스듬하게 쓸어도 기능이 작동하는 휴리스틱스(특허번호 949), 이어폰에서 플러그 내 마이크를 인식하는 기능(특허번호 501) 등 번호가 매겨진 특허들을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만큼 내용도 복잡했다. 

1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각 나라에서 50여건 소송에 대한 판결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서두에 언급한 삼성전자 관계자의 말을 들은 것도 바로 이 때다. 애플의 본토인 미국에서 미국 법원이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는 '승소' 관련 보도자료를 삼성이 뿌렸다. 시간이 흘러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미 법원이 일부 특허권에 대해 삼성의 침해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삼성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보도자료였다.

앞서 새너제이법원에서 열린 1심 판결에서 9명의 배심원이 애플의 손을 들어준 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따른 일종의 텃새’로 의심을 받고 있는 와중에 나온 미 법원의 판결이라 보도자료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궁금하니 물었다. 예상된 답이 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자신들이 보낸) 보도자료 내용이 맞다"고 확언했다.

미국 현지 뉴스를 찾기 시작했다. 판결문을 직접 보고 쓴 현지 언론은 삼성이 보낸 보도자료 내용과 달리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중요한 특허권에 대해선 애플이, 그다지 중요치 않은 특허권은 삼성이 이겼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애플의 승리'라고 결론 내렸다. 사실 확인이 필요해 삼성에 물었더니 돌아온 말이 바로 기자의 '국적' 확인이었다.
 
기억을 소환해 그때의 말을 떠올려보면 "언론에 보도된 기사도 법원에 증거 자료로 제출된다. 애플은 미국 언론들이 도와주고 있는데, 삼성전자는 한국 언론들이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관계자의 말에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삼성전자 보도자료 위주로 기사를 쓴 뒤, '애국심'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놀랍게도 2012년 삼성전자를 2024년 다시 만났다.

지난달 8일 삼성전자 내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하 전삼노)가 총파업을 시작한 뒤였다. 총파업 직후 "반도체 생산에 차질은 없다"며 삼성전자는 여유를 보이는데 사흘 뒤인 7월 11일자 일부 조간에선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전 세계가 반도체 패권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노조 파업으로 삼성의 반도체 공장이 멈출 경우 발생할 천문학적 피해나 고객사 이탈 등의 내용 일색이었다. 여기에 '경쟁사는 노조가 없다'거나 '연봉 1억2000만원 노조'라는 글로 '귀족노조'라는 프레임도 씌웠다.

삼성전자 노조는 사측이 파업 저지를 위해 언론사 로비에 들어갔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2012년 개인적 경험이 떠오른 이유였다. 요즘 말로 '국뽕'을 앞세운 일종의 '입틀막(입을 틀어 막는다)'이 아닐까 의심도 생겼다. 

어찌됐건 언론 보도는 주효했던 듯 싶다. 노조는 이후 기자들의 전화를 피했다. 노사 간 끝장 협상은 결렬됐고 파업 25일 만인 지난 1일 노조는 현업 복귀를 선언했다.

얼핏 보면 삼성전자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런데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국뽕'과 '입틀막'에 이어 '수원빵'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다. 수원빵은 수원에 반도체 공장이 있는 삼성전자의 '성과급 0원'을 빗대 부르는 말이다. 이천에 반도체 공장이 있는 경쟁사 SK하이닉스가 풍성한 성과급 덕에 '이천대감'이라는 기분좋은 별칭을 듣는 것과 비교된다. 

근거는 분명하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을 맡는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의 올 상반기 성과급을 기본급의 최대 75%로 정했다. SK하이닉스는 이보다 두 배 높은 기본급의 150%를 상반기 성과급으로 지급한다. '수원빵'이 우려되는 건 해외 경쟁사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인력 빼가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국뽕'을 앞세운 '입틀막'이 2024년에도 재현됐을 거라는 게 그저 의심과 오해이기를 바라는 이유다. 애플을 상대로 애국심을 말하던 2012년과 달리 지금은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함께 싸워야 할 아군에 총을 겨누는 느낌이니까.

참고로 '수원빵'의 '빵'은 숫자 '0'인 동시에 총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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