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유난히 악재가 많은 한 해였다. 연초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지정학적 리스크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채 진화되기도 전에 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이 잇따라 닥치면서 소비심리를 위축시켰다. 대내외 악재 속에서 이렇다 할 전환점을 찾지 못한 가운데 4분기를 앞두고 주요 산업에 대한 내년 전망치를 따져 봤다.
◆가격 하락 예상되는 반도체 업계 '흐림'
반도체 업계는 당분간 흐린 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JP모건 등 주요 투자사들은 내년 상반기까지 반도체 가격이 두드러지게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D램과 낸드플래시의 평균 판매 가격이 하락하면서 전체 메모리 시장 약세를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만 시장조사업체인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달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은 전월 대비 각각 14%, 4%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JP모건은 D램 시장 규모가 내년에는 5% 축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낸드플래시 시장의 내년 성장률 전망치는 10%대 수준으로 점쳐진다.
또 다른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도 부정적인 관측을 내놨다. 인플레이션 상승에 따라 소비자 수요가 줄면서 매출에 타격을 받는 현상이 2023년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8개월 동안 수요 급증으로 매출이 증가한 가운데 가트너는 올해 성장률을 13.6%로 하향 조정했다.
가트너의 반도체 및 전자 부문 부사장인 리처드 고든은 "반도체 공급난이 줄어들고 있지만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약세에 접어들고 있다"라며 "2023년까지 반도체 매출은 2.5%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대규모 투자 계획에도 비상이 걸렸다. 국내 일부 기업의 대규모 증설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나 최근 들어 글로벌 IT 수요 약화로 기업 투자 계획이 하향 조정될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4조 3000억원 규모인 청주공장 증설 계획을 보류하기로 했다. 내년 설비 투자 가운데 상당 폭을 조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재고를 통해 수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되 설비 투자도 이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아직은 우려할 만한 단계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수요를 고려하면 비관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데이터 저장에 필수적인 클라우드 산업 등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대한 수요가 지속되고 있는 만큼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계속 늘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메모리 반도체는 말 그대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른바 시스템 반도체로 통하는 비메모리 반도체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보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핵심 기술로 꼽힌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도 경쟁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부문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장균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하반기에도 경기 불황의 영향을 받겠지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으로 갈 수밖에 없는 만큼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며 "대내외적 악재로 투자 규모가 쪼그라드는 등의 어려움이 반도체 산업의 성장세를 다소 둔화시키는 반작용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하반기 전망을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라고 평가했다.
◆환율 영향 지속···자동차업계 '맑음', 항공업계 '흐림'
자동차업계와 항공업계도 꽉 막힌 대내외 악재 속에 4분기 실적을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원·달러 환율과 유가 상승 등이 희비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데 따라 숨통을 틀 가능성이 높아진 반면 항공 업계는 유류비·운영비 등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수출 비중이 높은 자동차 업계는 환율 상승의 수혜를 제대로 보고 있다.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국내 완성차 시장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61.9%(129만5679대)로 내수(38.1%·79만5378대)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와 기아는 고환율에 힘입어 올해 2분기에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다. 현대차와 기아는 올 2분기에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각각 영업이익 6410억원, 5090억원 증가 효과를 봤다. 당초 현대차그룹은 올해 원·달러 환율을 1130원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2분기 평균 환율은 126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2.35% 상승해 매출 확대와 실적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반면 항공사는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통상 유류비와 항공기 리스료 등은 달러로 결제하는 탓에 환율이 상승할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여기다 환율이 오르면 해외 여행시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만큼 여행객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엔데믹으로 전환하면서 여객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졌던 항공업계에는 악재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대한항공은 올 상반기 기준으로 원·달러 환율 10원 상승 시 약 350억원 손실을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나항공도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르면 284억원 정도 외화 손실이 발생한다.
대한항공은 환율 변동으로 인한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원화 고정금리 차입'을 추진하고 있다. 또 원화와 엔화 등으로 차입 통화를 다변화해 달러화 차입 비중도 줄이고 있다. 2020년에는 달러 변동금리를 달러 고정금리로 변경하는 1357만 달러(약 183억원) 규모 이자율 스와프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지난 5월에는 유로를 달러와 교환하는 5600만 유로(약 755억원) 규모 통화선도계약도 체결했다. 통화선도계약은 미래 특정 시점에 특정 통화를 미리 정한 가격에 매매하기로 하는 계약을 의미한다. 주로 환율 변동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사용된다. 저비용항공사(LCC)도 고환율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티웨이항공은 올해 상반기 500억원대 환손실을 입었고, 제주항공과 진에어도 각각 260억원, 224억원 손실을 입었다.
◆"불확실성 여전한 대내외 환경···경제 영향 점검해야"
재계에 따르면 주요국 금리 인상, 우크라이나 사태 등 상황을 반영해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을 3.1%로 볼 때 내년 세계 경제는 2.9%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국제유가(두바이유 기준)가 배럴당 평균 101달러였다면 내년엔 93달러 수준으로 다소 하향 조정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경기 둔화, 자본 조달 비용 상승 등으로 인해 당분간 산업계에서는 설비 투자가 지연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화학 분야는 공급과잉에 따른 수익성 악화 등으로, 철강·금속가공 업계는 중국 수요 둔화 등으로 투자 심리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현재 진행 중인 반도체 업종의 투자가 본격화하면서 상반기 중 일시 반등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씨티그룹은 반도체 가격이 연내 반등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앞서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는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6.3%에서 13.9%로 하향 조정했다. 지난해 성장률(26.2%)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내년에도 반도체 시장이 둔화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도 WSTS는 2023년 반도체 시장 성장률을 4.6%로 내다봤다.
글로벌 시장 규모는 6620억 달러로, 2년 연속 강력한 수요가 있었던 예년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여전히 수요가 지속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와 배터리 부문도 전기차 등 신성장 부문을 중심으로 투자 확대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IT서비스와 통신 업체들은 디지털 전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와 5G 설비 투자를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주요 이동통신사 3사는 기존 통신 의존도를 낮추고 데이터 등 신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해왔다.
또 엔데믹 본격화로 팬데믹 이후 해외여행이 재개되면 운항 규모를 크게 줄였던 항공기 도입이 늘어나 항공업계에도 활로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내놓은 경제전망보고서를 통해 "중국 경제 성장세 회복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미국·유럽 경제 침체가 현실화하면 무역 경로 등을 통해 우리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라며 "향후 글로벌 불확실성이 높은 만큼 그 전개 상황과 경제적 영향을 주의 깊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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