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가 막판까지 오점으로 얼룩졌다. 특히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독주가 두드러졌다. 견제와 균형, 타협과 조정의 정치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치권에서 드물게 인기를 얻었던 민주당 이철희·표창원, 자유한국당 김세연 의원 등이 자성의 목소리를 내며 줄줄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민주당이 국회에서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과 대안신당을 들러리 세워 연합군 ‘4+1’을 형성, 각종 안건을 강행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원내 제2당이자 제1야당인 한국당은 배제됐다.
4+1이 일방 처리한 안건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 법안, 검찰·경찰수사권 조정 법안, 준(準)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관련 선거법안 등 이른바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 3대 법안이다. 공수처 신설과 검경수사권 조정은 쟁점이 많고 이해관계가 복잡해 20년 넘는 세월 동안 풀지 못한 숙제였다. 선거법안은 21대 국회를 구성하는 4.15 국회의원 총선거의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4+1은 사상 최대인 512조원 규모의 올해 예산안도 일방 처리했다.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들이대는 수사기관 개편안, 선거 참여 당사자들의 룰을 만드는 선거법안, 한 해 나라살림 규모·내용을 확정하는 예산안 처리 때 제1야당이 ‘패싱’된 것이다. 이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다. 전체주의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광경이다.
4.15 총선을 앞두고 한국당의 국정 ‘발목잡기’, ‘몽니’, ‘떼쓰기’ 등 측면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야당을 설득하고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 모든 정당을 안건 처리에 동참시키는 것은 여당의 책무다. 하지만 여당은 편법과 우회로 국면을 돌파했다.
연합군 소속 정당은 민주당과 바른미래당을 제외하면 초미니 정당들이다. 재적 의석 295석 중 129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교섭단체를 겨우 구성한 바른미래당(20석), 비교섭단체인 정의당(6석)·민주평화당(4석)·대안신당(7석) 등과 힘을 합쳐 원내 과반을 넘는 166석으로 108석을 가진 한국당을 제압한 것이다.
집권당의 이같은 독주에는 국회 의사진행 권한을 가진 문희상 국회의장의 역할이 컸다. 문 의장은 한국당이 신청한 법안 수정안의 제안설명을 자료로 대체하거나 토론 조기 종결을 종용하며 철저히 여당 편에 섰다. 국회의장은 관례에 따라 다수당 출신이 맡되 현행 국회법상 당적을 보유할 수 없다. 당적을 떠난 국회의장이라고 해도 친정에 마음이 가는 건 인지상정이다. 역대 국회의장 중 의사진행의 공정성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문 의장의 경우엔 도가 지나쳤다.
문 의장은 이래서 야당 등으로부터 ‘대물림 정치’ 비판을 받는다. 문 의장의 장남인 문석균씨는 이런 비판에도 지난 11일 경기 의정부에서 자신의 저서 ‘그 집 아들’ 북 콘서트를 열고 총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의정부 또는 의정부갑에서 6선으로 국회의장까지 한 아버지 문 의장의 ‘지역구 세습’ 논란이다. 둘째는 아버지의 국회의장 현직 유지 상태에서 실시되는 아들 공천과 선거 과정의 불공정 우려다. 20대 국회의 임기는 오는 5월 29일로 문 의장은 이번 총선 이후까지 현직을 유지할 수 있다. 문씨가 이번 총선 출마를 고집한다면 정치 금수저를 물고 나와 ‘아빠찬스’로 손쉽게 금배지 달고 정치하려 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길지 않은 우리나라 정치사에 부자(父子) 국회의원 대물림 사례는 많다. 외무부장관을 지낸 정일형 박사(8선), 정대철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5선), 정호준 전 의원(초선) 등 3대에 걸쳐 한 가문에서 총 14선을 했다.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조병옥 박사 가문은 본인 재선에 아들 윤형·순형 형제의 각 6선과 7선을 더해 무려 총 15선으로 우리나라 한 집안 최다선 기록을 세웠다.
국회의원 6선을 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 집안은 각각 아들 홍일(3선)·홍업(초선)씨, 진석(4선)씨와 함께 총 10선씩 했다. 이중재-종구, 정운갑-우택 부자는 각 총 9선을, 김진재-세연, 노승환-웅래, 정주영-몽준 부자는 각 총 8선을, 김상현-영호, 유수호-승민, 남평우-경필 부자는 각 총 7선을, 홍우준-문표 부자는 총 6선, 장성만-제원 부자는 총 4선을 기록했다. 이 부자 의원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표밭을 탄탄하게 다져놓은 지역구를 아들이 물려 받게 했다.
이런 정치사로 보면 문씨가 자질과 능력을 떠나 아버지 지역구에서 출마 선언하는 것 자체가 꼭 시비할 대상은 아니다. 아직 전략공천 또는 경선 특혜를 약속받은 게 확인되지도 않았다.
정치 명문가 집안 출신 아버지가 닦아놓은 지역구에 아들을 꽂아 넣는다 한들 금배지를 보장받을 수도 없다. 경선 등 험난한 공천과정에 이어 치열한 본선을 거쳐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본인 혼자 국회의원 9선을 하고 3김시대 상도동계를 이끌며 측근 등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상 공천장을 나눠주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작 한 때 ‘황태자’, ‘소통령’ 등으로까지 불렸던 차남 현철씨를 원내에 입성시키는데 결국 실패했다. 개인 최다선 의원으로 대통령까지 역임한 아버지의 지원이나 후광도 소용 없었던 셈이다.
문씨가 아버지의 국회의장 재임 중 아버지 지역구를 물려받아 이번 총선에 출마하는 것은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 않다. 공천 또는 선거 경쟁이 제한되거나 절차가 불공정하게 진행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더구나 지난 연말과 연초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격돌했던 국회에서 문 의장의 의사진행이 석연찮았다고 의심받은 상황이다.
문 의장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하겠다는 집권당 출신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는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로움이다. 문 의장은 문재인 정부의 지원 덕으로 입법부 수장을 맡았다면 문씨가 출마 시기를 차기 총선으로 미루도록 결단을 하는 게 마땅하다. 이는 문 의장이 지난 연말 연초 국회 의사진행과 관련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그 조차도 어렵다면 각 정당의 본격적인 공천경쟁 이전에 의장직을 조기 사퇴하고 아들이 무소속 출마토록 설득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이 15일 의정부갑을 전략지역으로 지정, 후보를 공모하지 않기로 한 것은 그만큼 문씨의 출마선언에 부담을 느낀다는 반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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