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② 대한민국 AI 생존 보고서-'보고서'를 찢고 '코드'를 읽어라]

선재관 기자 2026-02-05 15:34:44
[2편] 10년 단위 100조원 베팅… AI는 지출이 아닌 '문명 인프라'다 찔끔 투자는 필패(必敗) '50조+α' 10년 문명 인프라를 깔아라
대한민국 AI 생존 보고서-'보고서'를 찢고 '코드'를 읽어라

[이코노믹데일리]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닦을 때 반대론자들은 “차도 없는 나라에 무슨 길을 만드느냐”고 성토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2026년 오늘, 우리는 또 다른 고속도로 앞에 서 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라는 지능의 고속도로다. 이 길은 단순한 IT 산업의 한 갈래가 아니라 향후 100년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문명 인프라’다. 문제는 이 길을 닦는 비용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이라는 점이다.

글로벌 AI 시장은 이미 ‘쩐의 전쟁’을 넘어 국가 자본이 총동원되는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오픈AI는 1000억달러, 우리 돈 약 135조원을 투입해 초대형 슈퍼컴퓨터 데이터센터 ‘스타게이트’를 구축하고 있다. 구글과 아마존 역시 매년 수십조원을 쏟아부으며 AI 주권 강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은 CHIPS법을 통해 반도체와 AI 인프라에 수백조원을 수혈하고 있으며 중국은 국가 주도의 펀드를 앞세워 AI 반도체 자립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 중이다.

이와 비교하면 대한민국의 AI 투자는 여전히 ‘파편화’와 ‘단기 성과’라는 낡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 정부가 내놓는 수조원 단위의 예산안은 글로벌 빅테크 한 곳의 분기 투자액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민간 기업들 역시 주주들의 단기 실적 압박과 각종 규제 장벽 앞에서 과감한 10년짜리 베팅을 주저하고 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자금 규모의 차이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 인식’의 근본적인 차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대기업 집단은 전 세계 AI 시장을 떠받치는 HBM(고대역폭메모리) 분야에서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AI 생태계에서 ‘공급자’로서의 위상일 뿐 규칙을 설계하는 ‘주도자’의 위치와는 거리가 있다. 자체 LLM(거대언어모델)을 개발 중인 네이버와 카카오 역시 글로벌 빅테크의 압도적인 자본력 앞에서 쉽지 않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기업들이 단기 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금융과 제도의 구조적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 AI 모델 하나를 학습시키는 데만 수천억원이 소요되고 이를 운용하기 위한 인프라 유지에는 조 단위의 전력비가 뒤따른다. 투입된 자본이 의미 있는 수익으로 회수되기까지는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이상의 인내 자본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내 금융 환경은 여전히 안정적 담보와 단기 회수를 전제로 움직이고 정치권의 예산 심사 역시 1년 단위 성과 지표에 매여 있다.

이런 구조가 지속될 경우 대한민국은 글로벌 빅테크의 AI 모델을 빌려 쓰는 ‘기술 종속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생산한 데이터가 외국의 AI를 학습시키고 우리는 그 지능을 사용하기 위해 매달 사용료를 지불하는 구조다. 이는 단순한 무역수지 문제를 넘어 국가의 지식 자산과 의사결정 역량을 외부에 의존하게 되는 중대한 위험 요소다.

◆ 100조원 단위 ‘AI 국가 펀드’가 필요한 이유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9월 8일 서울시 중구 서울스퀘어에서 열린 국가인공지능(AI) 전략위원회 출범식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제는 판을 바꿔야 한다. 잘게 쪼갠 찔끔 투자를 합산해 큰 숫자인 것처럼 포장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 차원의 10년 단위 초대형 AI 투자 로드맵을 명확히 설정하고 최소 100조원 규모의 민관 합동 AI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일관되게 집행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AI 특별회계를 신설해야 한다. 매년 국회 심사에 따라 방향이 흔들리는 일반 예산 체계로는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다. 원전이나 철도처럼 예산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국가 인프라로 AI를 다뤄야 한다. 동시에 대기업이 전략적 AI 투자를 단행할 경우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현재 수준의 세액공제로는 글로벌 기업들과의 속도전을 감당하기 어렵다.

민간 금융권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정부 보증형 AI 펀드 확대도 필요하다. 기술력은 있지만 자본력이 부족한 AI 스타트업들이 데스밸리를 건널 수 있도록 국가가 위험을 분담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규제 샌드박스를 넘어선 AI 특구를 조성하고 데이터센터 전력 수급과 부지 문제를 국가가 직접 해결하는 방식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00조원이라는 숫자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낭비성 지출이 아니라 디지털 영토를 지키기 위한 미래 국방비에 가깝다. 오늘 100조원을 아끼다 내일 1000조원 규모의 시장과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삼성전자, SK, 현대차, LG 등 주요 기업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분투하고 있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국가적 자본의 흐름이 없다면 각개격파를 피하기 어렵다. AI 패권 경쟁은 더 이상 기술만의 싸움이 아니다. 누가 더 오랫동안 더 큰 자본을 견디며 투입할 수 있느냐를 겨루는 ‘자본 맷집’의 경쟁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경부고속도로와 초고속 인터넷망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통해 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제는 ‘지능의 고속도로’를 깔 차례다. 100조원의 베팅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글로벌 AI 생태계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