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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AI 여서(女書)' 프로젝트로 '미디어아트계 아카데미상' 수상

선재관 기자 2025-10-10 10:36:26
"인간만의 언어 창조, 고정관념 깬 예술적 시도" 억압 속 피어난 '여성 문자', AI를 만나 예술로 승화
동일한 문장을 영어, 중국어, 여서(Nushu), AI 여서로 표현한 예 [사진=KAIST]

[이코노믹데일리] KAIST 연구진이 인공지능(AI) 기술로 세계 유일의 여성 문자 ‘여서(女書)’를 재해석한 미디어 아트 작품으로 ‘미디어아트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국제 대회에서 수상했다. 

억압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소수자의 언어가 최첨단 기술과 만나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성과다. 동시에 ‘언어 창조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오랜 믿음에 균열을 내며 AI 시대의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KAIST는 10일 산업디자인학과 이창희 교수 연구팀이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알리 아사디푸어 컴퓨터과학연구센터장과 공동으로 진행한 ‘AI 여서’ 프로젝트가 세계 최고 권위의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인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Prix Ars Electronica) 2025’에서 디지털 휴머니티(Digital Humanity) 부문 영예상에 선정됐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여서(女書)’가 있다. 19세기 무렵 한자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중국 후난성의 여성들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문자 체계를 독창적으로 창조했다. 길고 가느다란 실 모양의 이 문자는 부채나 손수건에 수놓아지며 여성들의 기쁨과 슬픔, 연대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AI 여서’는 바로 이 문자에 담긴 ‘억압 속에서의 창조’, ‘여성 간의 연대’, ‘기존 언어 체계에 대한 도전’이라는 강력한 서사를 AI 기술과 접목했다.

KAIST 연구진은 컴퓨터 언어학 기술을 활용해 여서의 소통 방식과 구조를 AI에게 학습시켰다. 그 결과 작품 속 AI는 과거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새로운 단어와 문장 즉 새로운 언어를 생성해낸다. 관람객은 이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기계가 만들어내는 낯설지만 의미 있는 언어를 체험하게 된다.

이는 기술적으로도 놀라운 시도지만 예술적으로는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인간만이 언어를 만들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깨뜨렸기 때문이다. 또한 가부장적 질서와 서구 중심의 언어관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여서’를 AI를 통해 부활시킴으로써 기술이 어떻게 소외된 역사를 조명하고 새로운 페미니즘적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예술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위 치엔 순 박사, 이창희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알리 아사디푸어 영국왕립예술학교 CSRC 센터장 (왼쪽부터) [사진=KAIST]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매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미디어아트 경연대회다. 예술과 과학, 기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혁신적인 작품을 발굴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올해는 98개국에서 총 3987개의 작품이 출품됐으며 ‘AI 여서’는 그중 단 2개의 작품만이 선정되는 디지털 휴머니티 부문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창희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이번 수상에 대해 “역사·인문·예술·기술이 만나 빚어낸 사색적 예술이 세계적인 권위 있는 상으로까지 이어져 매우 뜻깊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동 연구자인 영국왕립예술학교 위 치엔 순(Yuqian Sun) 박사 역시 “삶과 연구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번 수상을 통해 큰 보람과 감회를 느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