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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ISDS 후폭풍(下)] 수천억 혈세 투입, 침묵하는 삼성…'구상권 청구' 목소리

성상영 기자 2024-05-23 06:00:00
정부, 美 헤지펀드에 '삼성 합병' 배상 '줄패소' 2400억 혈세로 물어줄 판…삼성은 '침묵' 일관 메이슨 판정문 공개되며 '구상 청구' 주장 확산 시민단체 "이재용 승계 대가 왜 국민이 치르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월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유대길 기자]

[이코노믹데일리]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투자자-국가 분쟁 중재(ISDS)에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메이슨 매니지먼트 등 두 곳에 연달아 패소하면서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할 처지가 됐다. 사태의 당사자 격인 삼성전자가 침묵하는 가운데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최근 시민단체는 지난 15일 메이슨 사건을 다룬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중재판정문이 공개된 직후 핵심 당사자인 삼성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금전적 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엘리엇의 경우 지난해 PCA 판정문에 공개된 배상금은 손실 원금을 포함해 총 1억1130만 달러(약 1507억원)였다. 이후 법무부가 결과에 불복하면서 영국 런던 법원에 취소 소송을 낸 사이 지연 이자까지 발생했다. 22일 현재 배상금은 1억1630만 달러가 됐다. 11개월 여 만에 우리 돈으로 67억원이 늘어난 셈이다. 
   
여기에 엘리엇은 삼성물산에게서 받은 합병 손실 합의금 659억원에 대한 이자 문제로 별도 민사 소송을 벌이고 있고 삼성물산 국내 주주들도 제일모직과의 합병으로 손실을 봤다며 이 회장 등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상태다.

시간이 흐를 수록 우리 정부가 지불해야 할 배상금이 늘어나면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국민의 혈세를 털어 삼성 합병 비용을 대신 낸다'는 날 선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삼성과 이 회장 측은 '직접적인 분쟁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침묵에 자신감을 더한 건 지난 2월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를 다룬 1심 판결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이 회장에 적용된 △자본시장법 위반 △업무상 배임 △외부감사법 위반 등 19개에 이르는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비율(1대 0.35)을 산정할 당시 회계 처리에 문제가 있었더라도 고의가 아니었다는 논리였다.

1심 무죄 판결은 합병의 절차적 결함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이 회장을 떼어낸 것으로 평가됐다. 삼성의 입장은 재판정에서 변호인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이후 잠시 잦아들었던 삼성과 이 회장을 향한 책임론은 메이슨 사건 판정문 공개를 계기로 다시 커지고 있다. 특히 엘리엇 판정문과 달리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회장 간 '공모' 사실이 메이슨 판정문에 담기면서 구상권 청구에 힘이 실렸다.

PCA는 한국 정부가 메이슨에 800억원 가량을 배상하라고 주문하면서 과거 박 전 대통령과 이 회장 간 청탁이 오갔다고 봤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데에는 보건복지부와 박 전 대통령이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러한 행위 이면에 이 회장의 청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국제 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법무법인 수륜아시아 변호사는 "메이슨 사건에서 PCA는 이재용 회장을 정확히 짚었다"며 "판정문을 보면 커먼 언더스탠드(공동의 이해), 즉 형사적인 의미로 '공모'가 있었고 이 회장이 청탁의 대가로 박 전 대통령에게 경제적 이익을 제공했다고 돼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과 이 회장이 헤지펀드 배상금에 관해 함구하는 사이 정부가 엘리엇과 함께 메이슨에 물어줘야 할 돈도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22일 기준으로 두 헤지펀드에 지불할 금액은 총 2400억원에 육박한다. 배상금은 지급이 늦어질수록 연 이율 5% 복리로 늘어나 5년 뒤에는 3000억원을 넘어설 거라는 계산도 나왔다(관련 기사 : 메이슨 판정문에 등장한 '공모'…이재용 '무죄', 2심서 뒤집힐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정부가 우선 엘리엇·메이슨에 배상금을 지급한 뒤 삼성과 이 회장에 구상권을 행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김은정 첨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배상액을 한국 정부가 부담할 게 아니라 불법에 가담하고 이득을 취한 자들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가 엘리엇 ISDS 판정에 불복한 이상 구상권 행사 여부는 미지수다. 오는 27일 시작되는 이 회장 항소심 결과도 변수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구상 청구가 가능하려면 그 이전 단계의 판결이나 결정에 당사자의 책임이 명시돼야 하는데, 형사 책임이 없으면 민사 책임도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