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삼성전자와 LG전자, SK하이닉스 등 가전·반도체 업종을 대표하는 기업의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큰 폭으로 감소했다. 반도체는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과 SK하이닉스가 각각 40% 넘게 매출이 줄었고 개인용 컴퓨터(PC)와 스마트폰 등을 비롯한 가전·정보기술(IT) 기기 역시 5~6% 안팎으로 역성장했다.
이들 기업의 최근 3년간 매출은 역 V자 형태를 띤다. 가전·반도체는 '물(수요)'이 끓어올랐다가 '불(유동성)'이 꺼지자 삽시간에 식어버린 냄비와도 같았다.
지난 2021년과 2022년 가전 시장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을 겪는 와중에도 성장세를 보였다. 봉쇄 조치 장기화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제품 수요를 견인했고 냉장고·TV·세탁기 등은 교체 주기와 보복 소비가 맞물려 판매가 늘었다.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린 점도 주효했다. 그러나 이는 단기간에 물가를 자극했고 금리 인상, 수요 억제로 이어졌다.
반도체 역시 지난해 상반기까지 데이터센터 서버 증설·교체, PC와 모바일 제품 판매 호조로 '슈퍼 호황'을 보내다 그해 말부터 업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수요가 급감하면서 가격이 빠르게 내려갔고 재고는 늘었다. 올해 3분기 기준 누적 적자는 삼성전자 DS부문 12조7000억원, SK하이닉스 8조1000억원에 이른다. 그나마 감산을 통해 가격 하락을 막아내면서 4분기에는 손익분기점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된다.
갑진(甲辰)년에는 가전과 반도체가 서로 다른 길을 걸을 전망이다. 가전은 내년에도 수요 부진에 시달릴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글로벌 금리 인상을 주도한 미국이 피크 아웃(peak out·하락 전환)에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데다 소비 심리 회복을 예상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면 반도체는 D램을 중심으로 저점을 지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산업연구원은 지난 4일 발표한 '2024년 13대 주력 산업 전망' 보고서를 통해 비슷한 예상을 내놨다. 가전은 수출이 81억1400만 달러(약 10조6700억원)로 올해보다 2.3%, 내수가 29조5400억원으로 0.9%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됐다. 반도체는 수출 1113억8200만 달러(146조4700억원), 내수 67조9900억원으로 각각 15.9%와 9.4% 성장이 점쳐졌다.
◆가전 업계 악재 돌파구는 '혁신'과 '車'
가전 업계에 부정적인 신호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한 가지는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내구재(3년 이상 수명을 가진 품목)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 상무부가 최근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 10월 개인소비지출(PCE) 지수 중 내구재 지수는 1년 전보다 2.2% 떨어졌다. PCE는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통화정책을 수립할 때 관심 있게 보는 물가 지표 중 하나다. 내구재 지수 하락은 수요가 감소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통화 긴축으로 금리가 올라간 결과 소비 여력이 떨어졌다는 해석이다. 다만 임금이 꾸준히 오르고 물가상승률이 목표치(2%)에 근접해 반등 가능성이 엿보인다.
내수 시장은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이 내년에도 이어지며 소비가 얼어붙을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3.6%)보다 다소 안정된 2% 중반대에 머무르겠지만 전망치가 상향 조정될 변수가 많다. 통상 가전제품 수요는 다른 품목보다도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 하락, 혼인 건수 감소도 악재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가전 업계는 대형·프리미엄 제품 판매에 주력하는 한편 신(新)가전 출시를 통한 신규 수요를 창출로 위기를 돌파한다는 전략이다. 최근에는 냉동식품이나 밀키트 조리 기능을 강화한 올인원(All-in-one) 조리기, 자체 정수 필터를 탑재한 가습기 등 혁신을 가미한 제품이 주목을 받았다.
아울러 인공지능(AI)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개인화·최적화를 강조하는 트렌드가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업황 부진에 따른 저조한 실적을 가전과 자동차 간 결합이나 차량용 전장 부품으로 보전하려는 노력도 계속된다. 내년 1월 미국에서 열리는 'CES 2024'에서는 올해와 마찬가지로 삼성전자는 '초(超)연결', LG전자는 '고객 경험'을 전면에 내세운다.
◆D램·낸드 엇갈린 운명···안도하긴 이르다
반도체는 확실히 상승 기류를 탔다. 하락을 거듭한 D램 가격이 바닥을 찍고 반등에 성공했고 재고도 상당 부분 소진됐다는 평가다. AI를 구동하는 데 필요한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차세대 D램 시장을 주도할 게임 체인저로 주목을 받았다. 또한 DDR5가 주류로 자리를 잡으며 반도체 제조사 실적을 견인할 것으로 예측된다.
내년 반도체 업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주도권 경쟁이다. 업계에서는 '만년 2등'이었던 SK하이닉스의 움직임을 심상치 않게 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큰 손으로 꼽히는 엔비디아를 고객사로 확보하며 4세대와 5세대 HBM 분야에서 승기를 잡았다. 지난 3분기 서버용 D램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50%에 육박하는 점유율로 삼성전자(35%)를 넘어섰다는 집계가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D램은 청신호가 켜졌지만 낸드는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 반도체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AI는 고용량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처리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데이터 처리 속도는 연산장치 다음으로 D램 성능이 좌우한다.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인 낸드는 AI 효과를 비켜 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낸드 수요 회복은 빨라야 내년 말쯤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낸드 부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 공장 가동 정상화 시점을 늦출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SK하이닉스는 다롄에서 각각 낸드 생산라인을 운영 중이다. 미 행정부의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 반입 규제 리스크가 일부 해소됐지만 침체된 수요가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특히 인텔로부터 다롄 낸드 공장을 인수한 SK하이닉스는 투자금 회수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계열사별 투자를 재점검하라"는 취지의 문책성 언급을 하며 솔리다임 인수를 예로 든 것으로 알려졌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주도로 시행된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반도체와 과학법)'도 변수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500억 달러 넘는 보조금과 세제혜택을 내걸었는데 약속 이행이 미뤄지고 있다. 미국의 '당근(인센티브)과 채찍(규제)' 양면 전략에 따라 대규모 현지 투자를 감행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서는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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