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리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참관 중이다. 막 갈비뼈 사이에 구멍을 뚫어 흉강경을 삽입하려는 중이다. 분할된 여러 화면을 통해 집도의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및 간호사 등 수술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동선 파악이 가능하다.
마치 게임 같지만 게임이 아닌 이곳, 메타버스가 구현된 수술현장이다.
◇ 의료계는 너도 나도 메타버스 접목 중
최근 산업계 화두로 떠오른 메타버스가 병원 및 제약바이오 업계에도 파고들고 있다. 아직 초기단계이지만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이란 새로운 화두가 원격의료시장까지 열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메타버스란 현실의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를 통해 일상 활동과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3D기반 가상세계를 말한다. 가상을 의미하는 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universe의 합성어로, 1992년 출간된 소설 '스노 크래시' 속 가상 세계 명칭인 '메타버스'에서 유래했다.
메타버스가 의료현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지난 5월, 메타버스 기술을 이용한 폐암수술을 스마트수술실에서 진행했다. 참석자들은 마치 게임처럼 본인의 아바타를 설정한 후 수술실에 입장했다. 그들은 구축된 360도-8K-3D카메라를 통해 집도의와 수술 간호사의 모습, 수술실 내 환경을 원하는 대로 볼 수 있어 실제 수술실 안에서 참관하는 것 같았다고 평가했다.
해당 플랫폼은 가상환경 뿐만 아니라 3D XR 이머시브 사운드 기술을 통해 고품질의 원활한 실시간 음성지원과 실제 환경과 같은 다양한 화면 구현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전상훈 교수는 “지난해부터 코로나19로 촉발된 이동 제한으로 메타버스 시대가 급물살을 탔다”며 “특히 의료분야는 감염 우려 탓에 당장 대면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실습이 중요한 의학교육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단순히 VR 콘텐츠 몇 개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빅데이터·인공지능·5G 등 첨단 기술을 확장현실 기술과 융합한 가상의 종합병원을 구축한 뒤,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다 상위 개념의 서비스로 헬스케어 메타버스 시장을 선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료 실습교육에도 점차 메타버스가 도입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최근 의대 커리큘럼에 메타버스를 적용한 실습 교육을 진행 중이다. 해당 교과는 ‘해부신체구조의 3D영상 소프트웨어·3D프린팅 기술 활용 연구 및 실습'이다. 수강생들은 의료영상을 가상세계로 확대 적용하며 의료영상을 활용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와 유사한 서비스로 국내 헬스케어 스타트업 뉴베이스가 개발한 '뷰라보'라는 시뮬레이션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이는 의료 빅데이터에 기반한 가상 환자를 통해 교육 실습을 반복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다. 정맥주사나 채혈 같은 간단한 실습부터 호흡기계 중환자 관리, 재난 중증도 분류 등 복잡한 과정까지 학습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아예 가상현실에 새로운 병원을 만들기도 한다. 차의과학대학교 일산차병원은 지난 6월, 개원 1주년을 맞아 병원계 최초로 가상공간인 제페토월드에 또 다른 일산차병원을 개원했다.
제페토는 대표적인 메타버스 콘텐츠로,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해 가상현실에서 나만의 아바타를 만들어 나이·성별·인종 등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해주는 플랫폼이다. 월드에 입장하면 다양한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다.
일산차병원은 7층 이벤트홀, 산과, 초음파실, 6층의 분만실, 지하 1층의 행정 사무실 등을 똑같이 구현, 코로나로 인해 병원 방문이 어려운 직원 가족들과 고객 등을 대상으로 병원 내 가상 공간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이벤트 행사 등을 진행한다.
◇ 실습 등 순기능 크지만 원격의료까진 넘을 산 많아
그렇다면 메타버스가 의료계나 제약업계에 새로운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지만 지나친 기대는 피해야 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조언이다. 무엇보다 메타버스에 대한 학계와 산업계의 통일된 정의가 없는 점에서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업계에서는 메타버스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건 다 붙이는 분위기고, 그렇기에 조악한 수준의 메타버스들도 양산될 수 있다.
그나마 메타버스에 대한 가장 알맞은 예시가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오아시스처럼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을 모두 아우르는 확장현실(XR)이다. 다만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확장현실은 근미래에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따라서 관련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려면 해결해야 할 기술적 과제도 많고 그만큼 투자도 이뤄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관련 생태계가 구축돼야 하는데 만만치 않다.
뷰라보를 제작한 뉴베이스 박선영 대표는 “의료인 양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실습인데, 최근에는 환자의 안전이나 프라이버시 등을 이유로 실습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가상병원을 구축해 의료 빅데이터를 활용해 만든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습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박 대표는 "앞으로 환자 증상에 따른 호흡까지 구현해 진단, 처치 등 실습이 가능한 가상병원 메타버스 서비스인 뷰라보 플러스도 출시되는 등 실습 관련 메타버스 서비스는 점차 진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의료계나 제약업계에서 메타버스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 개정이 필요하다. 시공간을 초월해 환자에게 헬스케어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원격의료를 의미하며, 이는 현행법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의료 역시 서비스라는 개념이 커지면서 더 이상 공급자가 아닌 환자의 입장에서 편의를 우선시하게 됐고,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이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고 있다”며 “의료계 일부에서 대형병원 쏠림현상을 우려하며 반대하고 있지만 원격의료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원격의료라는 표현은 조금 맞지 않아 다른 대체 용어가 필요해 보이며 도서·벽지 등 의료 취약지 거주자나 만성질환자, 거동이 불편한 노인·장애인 등부터 순차적으로 실행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코로나19로 인해 지난해 2월 24일부터 한시적으로 비대면 진료를 허용했으며, 지난 6월 김부겸 국무총리는 1차 규제챌린지 과제에 비대면 진료 및 의약품 원격조제 규제 완화, 약 배달서비스 제한적 허용 등의 원격의료 내용을 포함시킨 바 있다.
Copyright © 이코노믹데일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