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삼성重, 4600억 소송 패소...해양플랜트 설계능력 확보 관건

이성규 기자 2021-03-10 14:51:47
스테나 ‘의도적 지연’ vs 실력 부족, 저가 수주 촉발

[사진=삼성중공업 제공]

[데일리동방] 삼성중공업이 해양플랜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주사의 의도적 지연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설계 능력이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과도하게 수주에만 몰두한 결과라는 비판도 나온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8일 스웨덴 스테나(Stena)사와 시추설비 건조 계약 해지 소송에서 패소해 영국 중재재판부로부터 4632억원(4억1100만달러)을 반환하라는 결정을 받았다고 공시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2013년 스테나와 7억2000만달러 시추설비 1척 건조계약을 체결하고 2016년 3월 인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테나의 잦은 설계 변경과 다수 요구사항으로 일정이 지연됐다.

2017년 6월 삼성중공업은 스테나에 공사기간(공기) 연장과 관련 비용 보상을 청구했다. 이에 스테나는 납기불이행을 사유로 건조 계약해지를 통보하고 선수금과 경과이자 등 반환(4632억원)을 요구했다. 같은 달 삼성중공업은 영국 중재재판소에 계약해지 적법성에 대한 중재를 제기했고 재판부는 스테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삼성중공업은 영국 고등법원에 항소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막대한 자금유출도 문제지만 선주사가 의도적으로 공정을 지연시키고 계약을 파기해도 된다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향후 수주 과정에서도 불확실성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이 스테나와 계약을 체결하고 이듬해인 2014년 10월 국제유가는 배럴당 90달러 수준에서 같은 해 말 50달러대로 하락했다. 스테나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고 이후에도 경쟁적으로 원유를 생산하는 산유국들의 기조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삼성중공업이 주장하는 스테나의 ‘의도적 지연’은 합리적 의심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을 두고 오롯이 삼성중공업의 편을 들기도 어렵다.

해양플랜트는 2000년 중반 이후 지속된 고유가에 대응하기 위한 석유·가스자원 개발에 힘입어 고성장을 이뤘다. 국내 대형조선사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선 부문 부진을 극복하는 돌파구 차원에서 해양플랜트로 무게 중심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조선사들의 영업이익률은 2010년을 정점(유럽 재정위기 발발)으로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 삼성중공업 영업이익률은 2010년 10.8%에서 2014년 1.4%로 내렸다.

문제는 해양플랜트에 있었다. 해양플랜트는 상선보다 수익성이 높은 반면, 건조기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또 기본 설계 능력이 부족하면 공정관리가 어려워진다. 삼성중공업을 비롯한 조선사들은 한마디로 실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단연 건조 비용이나 공기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해양플랜트는 그 특성상 선주사별로 맞춤 형태를 제공해야 한다. 같은 유형의 설비라도 투입되는 해저지형과 생산여건, 용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건조능력은 물론 엔지니어링 역량도 충분히 갖춰야 대응이 가능하다.

실력이 부족하다보니 경쟁력 제고는 자연스럽게 가격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유독 저가수주 문제가 두드러진 이유다.

이번 재판 결과에 따른 항소와 그 결과도 중요하지만 삼성중공업은 설계능력 향상을 통한 공정관리 개선이 숙제로 남는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평판 리스크’가 수익 본질까지 해칠 우려가 있다. 계약과 공정관리 문제가 반복되면 선주사로부터 수주를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탓이다.

한 신평사 관계자는 “항소를 통해 공정 지연에 따른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선사들이 설계 능력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며 “소송 결과 여부와 관계없이 관련 문제가 불거진다면 선주사들 입장에서 발주를 꺼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주 산업은 ‘신용’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평판 리스크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수주산업은 공사기간 동안 일부 선수금을 제외하고 대부분 자체자금이나 외부조달로 충당하는 헤비테일 방식으로 이뤄진다. 발주사와 수주사간 ‘신뢰’를 가늠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가 약속한 공사기간을 지켰는지 여부다. 이는 단연 삼성중공업의 신용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최근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국내 조선사들의 드릴쉽과 LNG선 수주가 이어지고 있다. 분명 희소식이지만 조선사들이 당장 부담해야 하는 자금규모도 확대된다는 뜻이다. 신용리스크로 공모채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삼성중공업은 자금 조달 창구가 축소된 상황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스테나의 의도적 지연도 문제지만 국내 조선사들이 설계 역량을 완벽히 갖추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라며 “드릴쉽 등 수주가 늘면서 수익성 측면 숨통은 트이겠지만 지속적으로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부담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공정관리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