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 주변 대형마트 입점제한 규제 존속기한을 5년 더 연장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이미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대형마트에 적용하는 의무휴업을 백화점과 면세점, 아웃렛, 복합쇼핑몰 등으로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유통 규제 법안이 무려 10건 넘게 발의·계류돼있다.
이미 유통업계는 골목시장 대 대형마트 구도가 아니라 온라인 대 오프라인 구도로 변화한 지 오래다. 코로나 사태는 이를 급속도로 바꿔놓았다. 이제 소비자들은 대형마트 문을 닫는다고 전통시장을 찾는 게 아니라 온라인 매장을 찾는다. 유통업계에서는 '시대에 역행하는 규제'라며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 무더기로 쏟아진 '보여주기식 법안'…기본 취지는 사라졌다
9일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법안들을 살펴보면 △대규모점포 개설절차를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 △전통상업보존구역 확대 △의무휴업일 지정 대상에 복합쇼핑몰·식자재마트 포함 △명절 당일 의무휴업 △지역협력계획서 강화 등 기존 오프라인 유통업체를 옥죄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문제는 오프라인 유통업체를 규제해 골목상권과 전통시장을 보호하겠다는 기본 취지가 실효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2017년 9월 시행한 연구에서도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에 '전통시장을 간다'고 대답한 소비자는 12%에 그쳤다. 반면 대형마트가 문을 열지 않으면 '쇼핑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7%로 두 배 이상 많았다. 오프라인 유통업체 규제가 전통상권 활성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유통기업의 대형 오프라인 매장 축소와 폐점으로 인해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한국유통학회가 최근 발표한 ‘정부의 유통규제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대형마트 1개 폐점 시 직간접 고용감소 인력이 1374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형마트 폐점에 따라 직접 고용인력과 입점 임대업체, 납품업체 등 945개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주변 상권 매출 감소에도 영향을 미쳐 반경 3㎞ 이내 범위에서 사라지는 일자리가 429개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문을 닫았거나 폐점될 예정인 점포 수는 모두 79개점으로, 이 보고서 계산대로라면 일자리를 잃게 되는 근로자가 약 11만명이나 된다.
특히 이들 매장에 입점한 대다수가 개인사업자(소상공인)이고, 거래처도 중소자영업자인데도 영업중단에 따른 피해를 이들이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지난 2012년 의무휴업일 시행 이후 학계나 조사기관 등에서 나온 연구결과는 대규모점포의 의무휴업이 실질적으로 전통시장 활성화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면서 "전통시장을 살리겠다는 기본 취지와 부합하지도 않는 규제를 강화하려고만 하니 답답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 대기업도 속수무책인 오프라인 유통…해묵은 규제만 반복돼
오프라인 유통업체에 대한 규제는 쇼핑 방식이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있는 시대적 추세와도 부합하지 않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백화점을 비롯해 대형마트, 편의점, 기업형슈퍼마켓(SSM) 등 오프라인 유통이 전체 유통업체 매출액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71.6%에서 지난해 58.8%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소비 패러다임이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오프라인 유통 자체가 잠식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전통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도 낡은 규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통시장과 온라인 플랫폼을 연계하는 정책 등이 보다 실효성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중소벤처기업부는 국내 소상공인의 판로를 지원하기 위해 라이브커머스를 활용하는 등 온라인과 연계한 대안을 내놓고 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대기업조차 오프라인 유통시장에서 맥을 못추는 상황인데 전통시장을 보호하겠다는 대책을 너무 안일하게 접근하는 것 같다"며 "유통 환경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해묵은 규제만 반복되는 것 같아서 아쉽다"고 토로했다.
◇ 해외 유통규제도 완화 추세…"규제 논의 전 유통환경부터 분석해야"
전세계적으로도 오프라인 유통규제는 사라지는 추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은 실질적으로 출점규제와 영업규제가 없다. 특히 일본은 지난 1974년 대규모점포법을 시행하면서 지자체가 출점여부를 허가하고 영업시간·휴일일수 등을 규제했지만, 미국이 이를 비관세장벽으로 WTO에 제소하면서 문제가 되자 2000년 대규모점포입지법을 통해 유통규제를 대부분 폐지했다. 1000㎡ 이상 소매점포를 세울 경우 지자체에 신고의무가 있을 뿐이다.
전통적으로 유통규제가 강한 프랑스는 1000㎡ 이상 규모의 소매점포 출점을 지역상업시설위원회 허가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도 기존 허가 기준은 300㎡ 이상의 점포였지만 지난 2008년 경제활성화를 위해 제장된 경제현대화법에 따라 1000㎡으로 규제를 완화했다. 영업규제도 지난 2009년 일요일 중 영업 가능 일수를 5일에서 12일로 확대하고, 국제관광지구와 핵심 역 내부 상점에 대해서는 일요일 영업을 허용하도록 완화했다.
영국은 오히려 도심 내 출점을 장려하고 있다. 도심 공동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유통업체가 도심 외 지역에 2500㎥ 이상 규모의 점포를 설립할 경우, 도심에 설립할 공간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독일은 지자체별로 일정규모 이상 점포를 대상으로 출점 규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출점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 사전에 출점 여부 판단이 용이하다. 이는 지역상생협력계획서를 통해 주변상가와 합의가 선행되지 않으면 출점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우리나라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유환익 전경련 기업정책실장은 "유통규제 강화 방안을 논의하기 이전에 기존의 유통규제가 변화하는 유통시장 환경에 적합한지에 대한 정책효과 분석이 필요하다"면서 "지금은 프랑스, 일본 등 해외 주요 국가들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유통규제를 완화하는 글로벌 추세와 온라인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는 유통시장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유통정책을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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