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새가 연상되어 자세히 보면 구름처럼 형태가 없다. 언뜻 보기에는 만화책에 나오는 말풍선의 형태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 형상을 찾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작가는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하지만 형상이 없고, 심지어는 붓질로 뭉개놔서 상을 없앤 흔적도 보인다. 30년을 회화에만 매진해온 영국의 '그림 달인'이 강남 한복판에 있는 갤러리의 개관작에 초대됐다.
서울 강북에 있는 학고재가 올해로 개관 30주년을 맞아 강남에 새로운 갤러리를 열었다.
99㎡(30평) 크기의 '학고재청담'은 갤러리로서 아담한 공간이지만, 젊은 컬렉터를 공략하려는 야심 찬 포부를 엿볼 수 있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학고재청담은 개관전으로 내년 1월 20일까지 피오나 래(Fiona Rae·55) 개인전 '피오나 래'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2014년부터 5년간 작업해 온 회화 11점을 소개한다.
우정우 학고재청담 대표는 지난 22일 기자간담회에서 "올해를 기준으로 많은 갤러리가 강남에서 철수하고 한남동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우리는 다시 강남으로 넘어와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며 "그 과정에서 작가들을 꾸준히 리서치를 했고 외국에서 정말 중요한 작가라고 인정받고 있지만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찾았다"고 말했다.
학고재청담은 서울 삼청로에 있는 학고재와는 다르게 밝고 경쾌한 이미지로 젊은 30~40대 연배의 컬렉터들을 공략할 계획이다.
우 대표는 "외국에서 바라보는 젊은 작가는 60년대생도 포함하고 있다" 며 "글로벌하게 봤을 때 외국의 흐름에 맞춰가는 것이 옳은 방향으로 보고 피오나 래 작가를 선택했다"고 강조했다.
전시장에 전시된 11점의 작품은 크게 2개의 시리즈로 구성됐다. 2014~2016년 제작한 '그레이 스케일(grayscale) 시리즈'와 2017~2018년 제작한 '화이트 시리즈'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피오나 래의 독특한 회화 습관 때문이다. 그는 작업할 때 미리 모든 것을 조율한 시스템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서 진행한다.
▶추상의 시작을 알린 '그레이 스케일(grayscale) 시리즈'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피오나 래는 "그레이 스케일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제 작업을 리플레시(refresh)하고 싶어서였다. 이전에 만화 캐릭터들의 시각 요소를 작품에 포함했다고 하면 그레이 스케일에서는 색깔을 빼고 조형 요소도 단순화해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시장에 걸린 '인물 1h'(2014), '인물 2e'(2016), '상상 1c'(2015), '상상 1g'(2015)은 검거나 회색의 배경색 위에 밝은 회색 선이 어지럽게 엇갈리고 있다.
이것은 래가 2013년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본 중국 남송 말기의 화가 진용(陳容)의 두루마리 회화 '구룡도권(九龍圖卷)'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래는 진용이 단지 몇 번의 붓질만으로 용이 파도와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을 그려낸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작업실에 그 그림을 실제 크기인 약 15m로 프린트해 붙여 두었다고 한다.
피오나 래는 "이전 작업에서 여러 가지로 보여줬던 물감 흩뿌리기라든가 그런 기법들을 전부 제외하고 오로지 붓 터치로 그려질 때 어떤 효과가 보이는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했다"고 고백했다.
그레이 스케일 시리즈부터 그의 작품에서 구상과 추상이 섞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왕이나 정치인을 그리려고 했다"고 말한 '인물 1h' 작품에는 엑스레이 같은 선만 있을 뿐이었다.
▶시를 닮아가는 '화이트 시리즈'
피오나 래가 2017년부터 시작한 화이트 시리즈에서는 없어졌던 색이 다시 등장하고, 유화로 수채화에 가까운 효과를 낸다. 또한 작품에서 추상이 점점 강화되고 제목은 시를 닮아간다.
그는 "검은색과 회색을 배제하고 오로지 흰색과 색채만을 이용해서 작업했다. 색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그림이 조금씩 어렵다는 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며 "이 시기에서 구상과 추상 사이를 탐구하면서 가장 큰 영감을 준 작가는 윌럼 데 쿠닝이다"고 고백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윌럼 데 쿠닝의 여인 시리즈는 당시 여인을 기괴한 모습으로 표현해 뉴욕 미술계의 논쟁 초점이 되기도 했다.
피오나 래의 화이트 시리즈는 만화 캐릭터와 같이 기존의 회화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요소들을 끌어오고, 그것을 직접 표현하기보다는 형상이 보일 듯 말 듯하면서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 시리즈를 보면 붓 터치로 뭔가를 그리고 그 뒤에 지워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몇 해 동안 그리고 스스로 지우는 것을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배경색이 점점 흐려지는 것도 볼 수가 있는데 마치 진화하는 듯한 모습을 작업을 통해서 구현하고 싶었다."
'옛날 옛적에 인어의 노래를 듣다'(2018), '백설공주는 자신의 세계에서 달을 꺼내 올린다'(2017),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2017) 등 화이트 시리즈 작품들은 제목도 흥미롭다.
"제목을 디즈니에서 접할 수 있는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The Tempest)' 혹은 '한여름 밤의 꿈'에서 구절을 따와서 짓기도 했다. 이렇게 순수미술과 대중예술이 섞이는 현상이 오늘날의 문화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제목을 지었다."
피오나 래의 작업은 관찰과 상상 그리고 붓의 감각적인 놀림으로 이어진다.
"작업실에서 작업을 위한 사진을 쭉 본다. 내 관심사를 반영한 것으로 동화도 들어있고 프라다 광고도 있고 피카소 작업 이미지도 있고 서예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쭉 모으고 종이에 연습하면서 그리는데,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선을 긋고 붓 터치에 반응해서, 붓 터치끼리의 대화가 작품이 된다."
▶피오나 래 작가 누구?
1963년 홍콩에서 태어난 피오나 래 작가는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부친을 따라 홍콩과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8세 때 영국으로 돌아가 정규 교육을 받았다.
학고재가 설립된 1988년은 20살이 된 피오나 래에게도 특별한 해이다. 그는 가장 주목받는 영국 작가 중의 한 명인 데미언 허스트가 기획한 '프리즈'(Freeze) 전시에 참여했고, 1991년에는 '터너상'(Turner Prize) 후보에 올랐다. 래는 1997년 '프리즈' 출신 작가들과 사치 컬렉션으로 꾸려진 전시 '센세이션'(Sensation) 전시에 참여하면서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회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2011년 여성 최초로 영국 왕립 아카데미 대학(Royal Academy Schools) 회화과 교수에 임용됐다.
래의 작품은 카리 현대 미술관(님, 프랑스), 에슬 미술관(클로스터노이부르크, 오스트리아), 쿤스트뮤지엄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 독일), 쿤스트할레 바젤(바젤, 스위스)에서 전시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파리),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 미술관(베를린), 테이트 컬렉션(영국), 허시혼 박물관 & 조각공원, 스미스소니언(워싱턴 D.C.) 등 세계 유수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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