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 영상톡]"농사짓듯 만들어낸 오브제 회화" 허경애 개인전 아트웍스파리서울

홍준성 기자 2018-07-10 14:38:06
서울 종로구 아트웍스파리서울 7월 31일까지

캔버스에 고랑을 만들고 농사를 짓듯이 칼로 긁어댄다.
잘린 조각들은 캔버스에 차곡차곡 쌓여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넘실댄다.
고되고 힘든 작업이지만, 칼을 든 손길이 수백 번, 수천 번 캔버스를 오간다.

[허경애 작가가 아트웍스파리서울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아트웍스파리서울에서 허경애 작가(41)의 개인이 7월 31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아트웍스파리서울에서 2년 만에 열리는 네 번째 개인전이며, 최근작 23점을 포함해서 총 40여 점을 선보인다.

임채진 아트웍스파리서울 대표는 지난달 26일 기자간담회에서 "허경애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는 원색의 색감과 칼로 긁어내는 기법이다" 며 " 그의 작품은 한국의 미니멀리즘 사조인 단색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여겨지고 있으면서 전 세계의 많은 대중과 평론가의 관심을 받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아트웍스파리서울에 전시된 허경애 작가 작품]


전시장에 들어서니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으로 된 100호짜리 작품들이 걸려있다.
작품들은 세로로 밭고랑이 파인듯이 덧칠한 물감이 잘려져 있고 캔버스 아랫부분에는 물감 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평면 회화에 조각으로 강렬한 물성을 추가해서 새롭게 만든 허경애 작가만의 독특한 작품이다.

전시된 작품에는 제목이 없다. 추상 작품인 만큼 관람객이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뒀다.
이미지를 직접 보여주진 않지만 색감과 마띠에르(질감)만이면 충분하다.
붉은색의 작품에서 가을산을 연상되고, 녹색의 칼이 지나간 자국에서는 대나무 숲이 보인다. 파란색의 작품 안에서는 대서양의 파도가 밀려온다.

[허경애 작가가 아트웍스파리서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회화의 지루함에서 찾아낸 오브제 회화

회화를 기본으로 해서 판화와 조형을 전공한 허경애 작가는 하얀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해서 마띠에르를 형성한 다음에 그것을 부수는 과정에서 본인만의 작품 세계를 찾아냈다.

허경애 작가는 "미술학도로서 계속 작품을 그려나가는데 항상 캔버스에 이미지를 넣어야 한다는 부담감 있었다" 며 "그려 넣어야 한다는 행위에 지루함을 느끼고 오래된 캔버스를 부수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는 물감을 다 꺼내기 시작했더니 물감의 흔적들이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캔버스를 발견하고, 그 작품을 파리1대학 교수님한테 보여줬더니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허경애 작가가 칼로 긁어낸 자국]


그는 회화를 재구성하기 위해 기존의 회화를 파괴하고 자르기, 접기, 긁기 등 3가지 기술을 기본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탐구했다.

실제로 자르기 실험을 위해서 캔버스 앞과 뒤를 두껍게 칠한 다음에 가위로 가늘게 잘라내 물감을 입힌 실타래를 만들기도 했다.

2000년 초반부터 시작한 자르기, 접기, 긁기 작업은 지신이 배워온 회화와 조각, 판화의 영향 아래 점차 정형화된 형태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앉아서 그리는 것보다 뭔가 회화 안에서 자꾸 응용을 해보고 싶었다. 여기까지 온 원동력은 학부에서 회화를 배우고 대학원에서 판화하고 다시 프랑스로 넘어가서 학교를 2개나 다녔던 '배움'이다. 현대미술, 개념예술, 비디오, 설치 등 다 해봤는데 어렸을 적에 좋아하는 회화로 다시 돌아오니까 제 것 같고 제가 만족한 것을 보여주니까 유럽사람들도 좋아했다."

사실 그의 작업은 회화와 조각 사이의 오묘한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윤진섭 평론가는 "전통적 회화를 넘어서는 오브제 회화의 새로운 차원"이라고 표현했다.

[허경애 작가가 칼로 긁어낸 조각을 접착제로 붙인 모습]


▶겹겹이 칠하고 칼로 긁어낸 다음에 조각을 붙이는 고된 작업

허경애 작가의 작업 과정은 3가지 단계로 나눈다.

아크릴물감을 겹겹이 칠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물감이 마른 다음에 칼로 긁어내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 긁는 과정에서 떨어진 조각을 접착제로 붙이는 작업이다.

물감에 물을 섞으면 긁는 작업에서 기포가 생겨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아크릴물감은 물을 섞지 않고 100%로 칠한다. 보통 30겹에서 많게는 70겹까지 칠해야 하므로 쓰는 물감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아트웍스파리서울에 전시된 허경애 작가 작품]


허 작가는 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처럼 '세로 자르기'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허 작가는 "초반에 긁을 때 상하좌우로 긁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었다" 며 "그러다 보니까 너무 방향성이 없어 보였고 결국에는 위에서 아래로 긁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자를 대지 않고 긁어서 방향이 비틀어진 적도 있어서 그 뒤부터는 자로 유도선을 그은 다음에 긁어낸다"고 말했다.

긁다가 캔버스까지 구멍을 낸 적도 많아서 일반 캔버스 천이 아닌 잘 찢기지 않는 고급 천을 사용한다.
처음부터 긁어낸 가루를 작품에 붙인 것은 아니다.
캔버스의 마띠에르가 많이 올라갈수록 그만큼 긁는 과정에서 조각이 많이 나오게 됐고,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됐다.

[아트웍스파리서울에 전시된 허경애 작가 작품]


▶며느리도 안 알려준다는 접착제의 비밀

긁어낸 조각을 붙이는 과정에는 한가지 특별한 비밀이 있다.

처음에는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기 위해서 레진을 사용했다. 하지만 말리는 과정도 힘들고 냄새도 너무 심해서 여자로서 다루기에는 힘든 재료였다.

허 작가는 다루기 쉬우면서 접합 자국이 남지 않는 제품을 찾아 전 세계에 있는 접착제를 다 사서 비교해보고 3년 만에 찾은 제품으로 지금의 작업을 하고 있다.

허 작가는 "갤러리에 있다 보면 재료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데 물어보면 아티스트들이다. 지금 사용하는 접착제는 한국에는 없는 제품이다" 며 "맛집에서 비밀 소스를 안 가르쳐 주듯이 접착제는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말하며 웃었다.

[아트웍스파리서울에 전시된 허경애 작가 작품]


▶여행 중에 취미로 칼 사는 여자

긁는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허 작가는 여행 중에 칼을 사는 것이 취미가 됐다. 긁는 칼에 따라서 결과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각칼을 비롯해 포크, 대패 등 최근에는 수술용칼 까지 깎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용한다.

"부다페스트에서 칼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거기는 프로들이 칼을 만들기 때문에 칼날도 디테일하다. 숟가락 모양에 따라 밥이 퍼지는 모양이 다른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다 보니까 수술용칼도 만지게 됐다. 칼날이 얇아서 조각칼보다 예민하게 조각이 떨어진다."
 

[아트웍스파리서울에 전시된 허경애 작가 작품]


▶대학만 네 군데 다닌 허경애 작가 누구?

허경애 작가는 1977년에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고 현재는 프랑스 파리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에브르에 살고 있다.
그는 광주예고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성신여대에서 판화를 배우다 2003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 조형예술을 하고 소로본 파리1대학에서 조형미술 석사를 마쳤다. 현재는 박사 과정에 있다.
원색의 색감과 독특한 기법으로 많은 사람의 이목을 단숨에 끌어당기면서 2013년도부터 유럽과 아시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파리(프랑스), 런던(영국), 브뤼셀(벨기에)을 중심으로 매년 아트페어(미술품 장터)에 참가하고, 부다페스트에 있는 갤러리에서 지난 3~4년간 개인전을 했다. 그는 아트웍스파리서울을 통해 한국을 기점으로 홍콩, 대만 등 아시아에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