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무언가인 ‘척’하며 살아간다. 유능한 직장인인 척, 흔들리지 않는 부모인 척, 모든 것을 다 아는 전문가인 척.
어느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던 한 셰프의 고백은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의 심장을 찔렀다. "평생 조림 잘하는 척하며 살아왔는데, 나 자신에게도 조림 요리를 해주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척'하며 버텨온 한 인간이 스스로의 자괴감을 마주하며 건넨, 가장 처절하고도 따뜻한 자기 위로였다.
많은 이들이 ‘척’하는 삶을 가짜라고 치부한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고 느끼며, 그 괴리감이 깊어질 때 우리는 자괴감의 늪에 빠진다. 어떤 이는 그 감상에 함몰되어 시인이 되고, 어떤 이는 견디지 못해 삶의 끈을 놓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그 지독한 ‘척’이야말로 우리를 오늘 이 자리까지 밀어 올린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척’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나를 미리 빌려 쓰는 ‘신용 대출’과 같다. 실력 있는 척하기 위해 밤새 칼을 갈고, 강한 척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그 ‘척’에 가까워진다. 조림 잘하는 척하며 수만 번의 냄비를 태워본 사람만이 비로소 조림의 대가가 되듯, 우리의 가면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 아니라 우리가 되고자 했던 목표가 구체화된 형상이다.
독재자든, 거물 정치인이든, 시대의 스타든 그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대중 앞에 서는 모든 이는 각자의 ‘척’을 수행한다.
대중은 그들의 완벽함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 ‘척’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붓는 필사적인 에너지에 공명한다. 때로는 수준 낮은 콘텐츠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도 그 안에 담긴 ‘솔직한 척’ 혹은 ‘만만한 척’이 주는 위로 때문이다. 논리는 나중에 도착하지만, "너도 나처럼 애쓰고 있구나"라는 직관적인 연결은 즉각적이다.
그러니 스스로가 가짜처럼 느껴져 괴로운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전문가인 척하며 견뎌온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연극이 아니었다고. 그 ‘척’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이 감내한 긴장과 노력이 당신을 실제로 더 나은 존재로 만들었다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쓴 채 위태롭게 걷고 있지만, 그 걸음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진짜 지도를 그려나간다. 오늘 당신이 쓴 가면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만큼 더 높은 곳을 향해 자신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모두 진짜인 척하며, 조금씩 진짜가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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