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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건설보다 관리가 숙제'…고준위 폐기물, 원전 산업의 새 변곡점

정보운 기자 2025-10-17 16:19:19

정부,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 출범…부지 공모 검토 착수

고준위폐기물법 시행 후 산업계 대응 본격화

인프라·수용성·국민 신뢰가 지속가능성 좌우

1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A홀에서 열린 ‘스마트에너지플러스 2025’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의 미래’ 컨퍼런스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토론하고 있다. [사진=정보운 기자]

[이코노믹데일리] 정부의 원자력발전소 정책 중심이 '건설·수출'에서 '관리·수용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국내 원전 부지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이 포화에 가까워지면서 폐기물 관리 체계를 법적으로 정비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판단에서다. 정부는 지난 2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지난달 26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 바 있다.
건설에서 관리로…원전 정책, 패러다임 전환
1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스마트에너지플러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의 미래' 컨퍼런스에서는 부지선정 절차와 사회적 합의, 갈등관리 방안을 둘러싸고 산업계의 새로운 과제가 제기됐다. 원전 산업 재도약의 완성은 기술이 아니라 '수용 가능한 인프라'와 '안전한 물류 체계'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은 원전에서 연료로 사용된 뒤 남은 '사용후핵연료'를 말한다. 일반 산업폐기물과 달리 수천 년 이상 높은 방사능을 유지하기 때문에 냉각·저장·운반·처분 등 모든 단계에서 고도의 안전 관리가 필요하다. 현재 국내 원전은 대부분 부지 내 임시저장시설(습식 또는 건식)에 보관 중이며 장기 보관을 위한 중간저장시설과 최종 처분시설은 아직 확보되지 않은 상태다.

현재 국내 원전은 발전소 부지 내 저장공간이 포화 상태에 근접했지만 고준위 폐기물을 옮길 중간저장시설 부지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원전 해체와 신규 원전 수출이 동시에 추진되는 가운데 '폐기물 관리 인프라'가 산업 신뢰의 핵심 변수가 되고 있다.
'수용성과 신뢰'가 핵심…학계·공단 '관리 모델' 제시
정재학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장은 이같은 현실을 짚으며 "설계 승인 제도를 통해 안전성을 입증한다면 중간저장시설 확보는 수년 내 가능하다"며 "국내 지질 환경에 맞는 처분 모델을 조기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인허가 심사 기간이 "1년 반에서 2년이면 충분하다"는 점을 들면서 "부지 선정만 조기에 이뤄진다면 20년씩 기다릴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우리 환경은 핀란드나 스웨덴과 다르기 때문에 화강암뿐 아니라 퇴적암, 담수 지하수 조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며 "한국형 처분 시스템의 개념 모델을 공식적으로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최적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방폐물 사업은 수익사업이 아닌 환경·안전 중심의 공공사업"이라며 "규제기관이 인허가 이후가 아니라 정책 초기부터 안전성 검토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처럼 규제기관의 역할과 심사 기한(3년)을 명확히 규정해야 제도적 신뢰가 쌓인다"며 "규제기관의 초기 개입이 사업자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 신뢰 확보의 선결 조건"이라고 덧붙였다.

기술적·제도적 접근 이후 현실적 행정 절차와 사회적 수용성 확보 방안 마련도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본부장은 "정부나 규제기관이 사업자를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주민과 언론 앞에서 중립적으로 설명하고 신뢰를 얻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핀란드가 주민에게 먼저 정보를 공개하고 언론은 그다음에 접근하도록 한 것이 상징적"이라며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문제가 생기면 즉시 설명하는 구조가 신뢰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이재학 본부장은 "성공한 해외 사례의 공통점은 원전 지역 주민들의 높은 이해도와 자율적 참여, 실질적 지역 지원이었다"며 "핀란드는 지방세 감면과 임대사업 지원, 스웨덴은 시민단체 감시권 보장과 지역지원기금 운영 등 보상보다 참여형 지원이 중심이었다"고 분석했다.

이재학 본부장은 국내 상황과 관련해 "현재 부지선정 절차는 후보 도출·공모·기본조사·심층조사·주민투표 등 5단계로 진행 중"이라며 "이 과정에서 지자체와 주민의 자율적 참여권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부지조사는 지질 안전성뿐 아니라 환경 영향, 지역 발전까지 함께 평가해야 하며 조사 계획과 결과를 모두 공개하고 주민 참여단을 운영해 투명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온라인 쌍방향 소통 시스템을 도입해 지역의 궁금증을 실시간으로 해소하고 참여 지역에도 지원 근거를 둘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본부장은 "결국 고준위 방폐물 사업 목표는 안전하고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것"이라며 "주민의 행복과 지역 산업 발전이 함께 가는 모델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산업 생태계의 시작점
방사능폐기물 관리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선결과제'라는 의견도 제기됐다.​​​​​​​ 은재호 KAIST 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방폐물 관리 정책은 임기 내 결정을 미루는 이른바 민간투자 현상에 취약하다"며 "사회적 합의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원전 확대 정책에 대한 국민 지지는 높아지고 있지만 실제 시설 수용성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며 "이는 위험시설을 자기 지역에 두기 꺼리는 합리적 반응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날 토론에서는 방폐물 관리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새로운 산업 생태계의 시작점으로 봐야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부지선정이 지연되면 해체 원전의 핵연료 운송과 보관 인프라가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는 지난달 공식 출범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를 중심으로 관련 제도 정비와 부지 공모 절차 착수를 검토하고 있다.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은 2030년대 중반까지 중간저장시설 확보를 목표로 운송·보관 기술의 표준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산업계에서는 향후 정부의 관리 인프라 구축 계획이 구체화되면 조선·해운·철강·방산 등 관련 업종의 참여가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모인 전문가들은 고준위 폐기물 관리 체계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경우 원전 산업의 신뢰도와 국제 경쟁력 확보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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