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범금호가(家)에서 대를 이어 벌어진 왕위 다툼의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다. 오너 2세인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이 '형제의 난'으로 각자도생에 나선지 10여년 만인 박찬구 회장과 그 조카인 박철완 전 금호석유화학 상무가 정면 충돌했다.
이른바 '조카의 난'으로 불린 분쟁은 지난해 7월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삼촌인 박찬구 회장이 승리하며 일단락됐다.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다. 박 전 상무가 여전히 개인 최대주주인 탓에 언제라도 연합군을 모아 기습을 감행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박 회장은 아들인 박준경 사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려 한다.
27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박 전 상무는 금호석유화학 지분 8.87%를 보유했다. 1978년생으로 동갑내기 사촌인 박 사장이 가진 7.45%보다 많고 현재 그룹을 이끄는 박 회장 보유 지분 6.96%를 넘어선다. 박 사장 여동생인 박주형 부사장(1.01% 보유)을 포함해 박 회장 측 지분을 모두 합치면 15%가 넘어 현재로서는 경영권 방어에 크게 문제가 없다.
◆박철완 전 상무, 지분 청산 않는 한 '잠재 위협'
금호석유화학그룹은 박찬구 회장 일가가 금호석유화학을 통해 전체 계열사를 거느리는 구조다. 금호석유화학이 핵심 사업회사인 동시에 지주회사 역할을 맡았다. 사업 포트폴리오(구성)를 봐도 석유화학 부문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박철완 전 상무는 지난해 임시 주주총회에서 박준경 사장의 사내이사 선임안에 반대하는 방법으로 삼촌에게 반기를 들었다. 당시 출석 주식 수 가운데 78.71%가 박 사장 사내이사 선임에 찬성했다. 박 전 상무 측 의결권을 제외하면 사실상 99% 찬성률로 봐도 무방하다는 해석이 나왔다. 박 전 상무가 주주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전혀 형성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조카의 난'이 종식됐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박 전 상무가 경영권 분쟁을 일으킨 때는 2021년 초다. 개인 최대주주인 자신을 사내이사로 선임해야 한다며 주주제안을 냈다가 패했다. 금호석유화학은 주총 직후 박 전 상무에 임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재계에서는 삼촌과 조카가 서로 감정이 상한 시점을 이보다 이전으로 본다. 박 사장과 박 전 상무가 나란히 승진 코스를 밟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균열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2020년 4월 임원 인사에서 박준경 당시 상무가 전무로 승진한 데 반해 박 전 상무는 승진자 명단에서 빠지면서 본격적으로 반란을 결심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박찬구 회장과 박 전 상무는 2010년 2월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금호석유화학으로 독립하면서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 이는 채권단 관리를 받아 온 금호석유화학이 한국산업은행 등과 맺은 경영정상화 합의에 포함된 내용이다. 박 전 상무는 박 회장의 둘째 형인 고(故) 박정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아들이다. 공동 경영 합의는 박찬구계(系)와 박정구계가 함께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의미였다고 볼 수 있다.
박 회장 입장에서는 조카를 받아준 것에 가까웠다. 박정구 회장은 2002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당시 박 전 상무는 24세에 불과해 승계 순위에 오르지도 않았고 경영 수업을 받지도 못했다. 게다가 박 전 상무는 2009년 금호아시아나그룹 형제의 난에서 박삼구 전 회장 편에 선 것으로 알려졌다. 박찬구 회장으로서는 자신과 대척점에 선 형을 편든 조카를 거둬들인 셈이다.
두 사람 사이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박 전 상무는 2010년 7월 채권단에 박 회장의 독단적 경영을 주장하는 항의 서한을 보냈다. 공동 경영을 선언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박 전 상무는 2019년 주총에 박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건이 올라오자 기권해 버렸다.
금호석유화학 조카의 난은 오랜 기간 갈등이 곪다가 터진 사건이다. 박 전 상무가 회사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뒤에도 지분을 청산하지 않은 만큼 '돌발 행동'을 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박준경 사장이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할 때까지 행동주의 사모펀드 등과 힘을 합쳐 흔들기에 나설 수 있다. 박 전 상무가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완전히 정리하지 않는 한 꾸준히 잠재적 위협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박 전 상무의 관심은 처음부터 경영권이 아닌 시세 차익에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사모펀드와 결탁해 주주제안을 내면서 의결권을 모으고 이 과정에서 주가가 오르면 보유 주식을 매도하려는 속내라는 것이다. 지난해 주총 표 대결에서 완패한 이후 현재까지 지분을 유지하는 점에 비춰 보면 경영권 확보든 차익 실현이든 때를 기다리는 상황으로 해석된다.
◆그룹을 통째 위기로 내몬 경영권 분쟁, 박준경의 해법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고(故) 박인천 회장이 별세했을 때만 해도 집안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박인천 회장은 슬하에 박성용·정구·삼구·찬구 등 아들 4명을 뒀다. 박인천 회장 사후 형제가 돌아가면서 경영을 맡기로 했지만 셋째 아들인 박삼구 전 회장대에 들어 문제가 생겼다.
박삼구 전 회장은 2002년 취임한 이후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회사 규모를 빠르게 키웠다. 2006년 대우건설에 이어 2008년에는 대한통운까지 인수하며 몸집을 불렸다. 처음 취임할 때 박 전 회장이 밝힌 일성은 "2010년까지 5대 그룹에 들겠다"였다.
박 전 회장이 성사시킨 M&A는 당시에도 '너무 무리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가장 크게 반발한 쪽은 차기 총수로 예정된 박찬구 회장이었다. 공격적 경영을 펼치는 형과 안정을 추구하는 동생 간 의견이 엇갈린 데다 박준경 사장이 박 전 회장 아들인 박세창 현 금호건설 사장보다 승진이 늦어지면서 형제 경영 체제에 금이 갔다.
박 전 회장은 2009년 박찬구 당시 석유화학부문 회장을 해임하고 본인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초강수를 뒀다. 박찬구 회장은 석유화학 사업을 들고 독립하는 쪽을 택했고 채권단은 이를 승인해 계열분리를 마무리했다. 이후로도 두 형제는 7년간 91건에 이르는 소송전을 치르다 2016년 8월 "모든 송사를 내려놓고 각자의 길을 가겠다"며 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범금호가에서 두 차례나 일어난 경영권 분쟁은 국내 기업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다. 앞서 벌어진 오너 2세 간 다툼은 결과적으로 한때 재계 서열 7위에 오른 금호그룹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룹 본체 격인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석유화학 계열분리 이후 빠르게 몰락하며 중견급 기업집단으로 주저앉았다.
박찬구 회장에서 박준경 사장으로 이어지는 승계 구도에서는 더는 경영권을 둘러싼 분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박철완 전 상무가 지분을 완전히 정리하든 사촌을 상대로 다시 한 번 공세를 가하든 금호석유화학으로서는 적지 않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박 사장이 보유 지분을 끌어올려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는 방법이 현실적이다.
박 사장은 지분 확대 이외에도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금호석유화학은 다양한 사업군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신사업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다.
금호석유화학과 함께 석화업계 '빅4'로 불리는 LG화학·한화솔루션·롯데케미칼이 이차전지 소재와 신재생에너지 분야로 보폭을 넓히는 데 반해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 부족하다. 재계 관계자는 "(박 사장이) 최근 관심을 보이는 탄소나노튜브 등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성과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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