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삼표그룹은 한때 재계 순위 30위권에 속했다가 지금은 100위권에도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비운의 기업집단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중견 기업집단으로 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데 위안을 삼는 정도다. 한껏 쪼그라진 사세와 달리 3세 승계만큼은 여느 기업집단 못지않게 착실히 진행 중이다.
오너 2세인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에 이어 후계자로 낙점된 인물은 정대현 사장이다. 정 사장은 삼표 3세들 중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일찌감치 후계자 코스를 밟았고 주요 계열사 지분도 가장 많이 가졌다. 정 회장이 슬하에 둔 아들은 정 사장뿐이다.
◆'재계 29위' 빛 바랜 영광에 남은 건 혼맥뿐
삼표는 강원도에 토대를 둔 기업이다. 전신인 강원산업이 1996년 삼강운수를 설립해 연탄과 골재를 운송한 데서 출발했다. 삼강운수는 1974년 삼표산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양회가 가진 공장을 인수해 콘크리트 사업에 진출했다. 이후 강원 삼척 일대를 중심으로 골재 채취와 레미콘, 철도 부설, 연탄 제조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일반적인 제조업과 달리 건설업 생태계 저변에서 몸집을 키운 삼표는 1997년 말 외환위기 무렵 재계 순위 29위까지 오르며 굴지의 재벌이 됐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고 그해 10월 모기업인 강원산업그룹이 워크아웃(재무개선)에 들어가면서 기업집단 전체가 분해되기에 이르렀다.
정도원 회장은 워크아웃 초입에 경영을 맡았다. 정인욱 창업주의 차남인 정 회장은 삼표산업을 비롯한 몇몇 계열사를 가지고 독립해 그룹을 재정비했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거치며 2006년 워크아웃을 완전히 마쳤다. 기업을 되살리기에는 성공했으나 몸집은 과거보다 훨씬 작아졌다. 삼표가 영위한 사업 자체가 쇠퇴한 영향도 있지만 100대 그룹에서조차 밀려난 것은 워크아웃이 남긴 뼈아픈 결과물이었다.
명성은 퇴색했지만 혼맥만 놓고 보면 화려하다. 정 회장 장녀인 지선씨는 1995년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차녀 지윤씨는 1998년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아들인 박성빈 사운드파이프코리아 대표와 백년가약을 맺고 출가외인이 된 상태다. 이들의 부친인 정도원 회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박태준 명예회장이 철강 사업을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철강 혼맥'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대현 사장은 2011년 범LG가(家)인 구자명 LS MnM(옛 LS니꼬동제련) 회장 장녀 구윤희씨와 화촉을 밝혔다. 이밖에 정 회장 형인 정문원 전 강원산업그룹 회장 자녀까지 포함하면 삼표 오너 일가는 두산, GS 일가와도 인연을 맺으며 '한 다리만 건너면 재벌가와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폭넓은 재벌 혼맥을 자랑했다.
◆명확한 후계자 정대현, '대표이사'엔 안 보여
삼표그룹은 일가의 혼맥 덕을 많이 봤다. 특히 과거 현대그룹과 현재 현대차그룹이 필요한 때마다 숨은 조력자 역할을 했다. 옛 강원산업그룹 구조조정 당시 철강 부문을 비롯한 일부 계열사를 사돈 집안인 현대그룹에서 인수했다. 이는 삼표는 워크아웃과 홀로서기를 무사히 마친 원동력이 됐다.
최근에는 장기간 사용해 온 서울 성동구 성수동 삼표산업 공장 부지를 현대제철로부터 넘겨받았다. 이 땅은 서울 시내에 몇 안 남은 금싸라기 땅으로 추후 개발이 진행되면 그 가치가 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삼표그룹으로서는 4조~5조원 수준인 자산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다.
정대현 사장은 그룹 경영이 충분히 안정된 이후에 경영권을 넘겨받을 것으로 보인다. 2005년에 삼표에 입사해 햇수로 19년째 경영 수업을 받는 만큼 내부 승계 작업도 상당히 진행됐다는 후문이다.
삼표의 승계 방식은 규모가 큰 다른 기업집단과 비교해 상당히 단순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까지 유력한 시나리오는 정 사장이 지분 71.95%를 보유한 에스피네이처를 매개로 지주사인 ㈜삼표 지분을 확보하는 경로다. 현재 ㈜삼표 지분은 정도원 회장이 65.99%를, 정 사장이 11.34%를 보유했다. 사실상 정 사장 개인 회사인 에스피네이처는 ㈜삼표 지분 19.43%를 가졌다.
삼표 지분구조를 보면 다소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정도원→㈜삼표→각 계열사로 이어지는 구조인데 지주회사인 ㈜삼표 위에 곁가지로 에스피네이처가 존재한다. 마치 옥상옥처럼 에스피네이처가 '지주사의 지주사'로 모호한 위치에 놓였다. 향후 에스피네이처가 ㈜삼표와 합병하면서 정 사장이 ㈜삼표 최대주주로 올라서는 이야기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에스피네이처는 승계 구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많은 내용이 베일에 가렸다. 이 회사는 자원 재활용 사업을 주로 한다. 내용 면면을 살펴보면 레미콘, 골재, 몰탈, 시멘트, 철스크랩 등을 수집·재활용하는 곳으로 그룹 계열사에서 매출 대부분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삼표그룹은 2021년 10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일감 몰아주기 의혹으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정 사장이 삼표그룹에서 사장 직함을 달았을 뿐 이렇다 할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맡지 않은 점도 의문이다. 정 사장은 현재 ㈜삼표와 삼표시멘트, 에스피네이처, 삼표레일웨이 등 7개 계열사 사내이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오는 27일 열리는 삼표시멘트 정기 주주총회 안건에는 정 사장 사내이사 재선임이 올라온 상태다.
지난 10일 공시된 삼표시멘트 주총 공고에는 정 사장 직책이 ㈜삼표 신성장실장, 삼표시멘트 사내이사, 에스피네이처 관리부문 최고경영자(CEO)로 돼 있다. 삼표시멘트에서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대표이사였으나 현재는 이종석 전 삼표해운 대표가 자리를 대신했다. 경영권을 직접 행사하는 자리는 사실상 CEO를 맡은 에스피네이처뿐이다.
정 사장이 승계 퍼즐을 상당 수준으로 맞추고도 경영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와 관련해 리스크(위험)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이 아니냐는 관측이 우세하다. 대표이사를 맡음으로써 안게 될 법적 부담을 최대한 피하겠다는 의도다.
실제 삼표산업과 삼표시멘트 등 계열사는 산업재해가 자주 발생해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 대상으로 여러 번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해 1월 경기 양주시 채석장 붕괴 사고로 작업자 3명이 매몰돼 사망하면서 중대재해법 1호 기업이 됐다. 서울 성수동 레미콘 공장에서는 2021년 9월 작업 중인 근로자가 트럭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났고 1년 앞선 2020년 12월에는 강원 삼척 석회석 광산에서 근로자가 매몰돼 목숨을 잃었다. 매년 사업장에서 산재 사망사고가 일어나면서 삼표그룹은 중대재해법 처벌 단골 기업이라는 오명을 안았다.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해당 기업 책임자와 법인까지 처벌 가능하다.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는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정 사장이 대표이사로 재직했다면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에스피네이처 기업가치 부풀리기 '필수 조건'
정도원 회장과 정대현 사장은 책임경영보다 안전한 승계를 택한 모습이다. 경영을 안정화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사법 리스크를 회피하는 전략으로 보인다. 정 회장이 당장 경영권을 물려줄 가능성은 낮지만 승계를 위한 정지 작업은 지금보다 빠르게 진행될 공산이 크다.
시선은 '옥상옥' 관계인 에스피네이처에 쏠린다. 정 사장이 가장 크게 영향력을 보유한 회사인 데다 ㈜삼표와 합병설이 꾸준히 제기되기 때문이다. 삼표가 에스피네이처를 흡수하고 이 과정에서 에스피네이처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하면 정 사장에 유리한 방식으로 합병 비율을 설정할 수 있다. 정 사장이 보유한 에스피네이처 지분 약 72% 가치를 높임으로써 합병 후 ㈜삼표에 대한 지배력을 끌어올리는 시나리오다.
관건은 ㈜삼표와 비교해 몸집이 매우 작은 에스피네이처 가치를 어떻게 높일 것인지다. 정 회장이 일감 몰아주기 의혹에 휩싸인 배경도 결국은 에스피네이처 기업가치 부풀리기와 연관이 깊다. 삼표시멘트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 모두 상장사가 아니고 삼표그룹 자산총액이 대규모 기업집단 기준보다 작아 내부거래 규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에스피네이처 사업 포트폴리오(구성)를 보면 자체적으로 성장할 여력이 크지는 않다. 향후 계열사 간 인수합병을 골자로 한 지배구조 개편 작업도 예상된다. 그룹 내 다른 계열사를 에스피네이처가 인수하고 몸집을 키워 기업가치를 높이는 방안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삼표 같은 지배구조에서 경영권 승계를 하려면 지주사 밖 지주사 느낌이 강한 회사를 그룹 내부로 완전히 편입하는 게 먼저"라며 "삼표는 다른 대기업집단보다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편"이라고 말했다.
Copyright © 이코노믹데일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