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년간 달러의 기축통화 자리를 지킨 건 석유다. 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달러로만 파는 배타적 결제 계약을 맺음으로써 무너진 금본위제 위에 달러를 재건했다. 그로부터 달러는 무한한 글로벌 수요를 바탕으로 막대한 주조이익(액면금액과 제조원가의 차익)을 누렸다.
석유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중국의 수요와 미국이 가진 셰일가스 매장량을 고려하면 당분간 석유 수요가 눈에 띄게 줄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탄소 제로'란 기치 아래 EU를 중심으로 선진국들은 석유 없이 사는 '오일 프리' 시대를 향해 방향을 이미 틀었다. 기축통화 달러의 친위대가 해체 수순을 밟고 있는 셈이다.
석유를 대체할 상품은 과연 무엇일까. 탄소 제로 시대 새로운 기축통화를 만들, 또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유지되는 제3의 브레튼우즈 체제를 뒷바침할 킹 메이커는 도대체 무엇일까.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전문가들은 전기를 꼽는다. 전기는 석유와는 전혀 다른 에너지지만 석유가 가진 킹 메이커의 DNA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
전기는 지속적인 글로벌 수요를 갖고 있고, 사실상 무한대로 생산이 가능하다. 석유가 가진 제왕적 DNA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00년~2017년 세계 전력수요는 70% 증가했다. 이 기간 에너지 소비량 중 전기 비중은 15%에서 19%로 늘었다. 중국과 인도 등에 전력 수요가 가파르게 증가한 것이다.
이 기간 선진국에서의 전력 수요는 에너지 효율이 개선되면서 오히려 감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 선진국에서의 전력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할 수 밖에 없는 요인들이 많다. 메타버스 등 가상세계의 발전과, 스마트 시티를 비롯해 에너지 소비 구조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비트코인 채굴에 들어가는 전력 소모량이 베네수엘라의 1년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다고 한다.
미래, 전기의 무한 생산이 가능해지는 건 태양광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태양광 발전이 가능한 이상 이론적으로 전기의 잠재 생산 능력은 무한대다.
독점, 적어도 과점 전기 공급자의 탄생이 가능하다. 석유와 달러의 배타적 결제 관계는 사우디 등 OPEC 산유국들이 석유 생산을 과점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점에서 현재 전기는 석유와 다르다. 발전소만 지을 수 있다면 어떤 나라도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 생산 단가를 지금과 비교해 상상 이상의 수준으로 낮출 수 있는 기술과 자본을 가진 기업 또는 국가가 생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럴 경우 각국은 에너지 안보를 보장하는 최저 수준의 전기만 자국에서 생산하고 나머지 전기는 수입해 쓸 수 있다.
한 가지 변수는 모든 가정이 전기를 자급자족하는 극단적인 마이크로 그리드의 실현이다. 지붕이나 창문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에너지저장장치(ESS)를 충전해 소비량의 100% 이상을 생산하는 가정은 지금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기가 석탄과 석유, 원자력 등의 에너지를 상당부분 대체하고, 메타버스 시대에는 전기 사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규모의 경제를 가진 독점 사업자의 등장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지난 10일 TV 인기 프로그램 '판타집'에 등장한 부산 서면의 한 고급 주택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도 전기세가 한달에 300만원 이상 나왔다고 해 출연자들이 깜짝 놀랐다. 이 집 주인이 김치 냉장고로 지은 창고는 한달에 전기료가 1000만원 이상 나와 지금은 일반 창고로 쓰고 있다.
가정해보자. 사하라 사막을 온통 집광판으로 뒤덮어 태양광 발전을 하는 사업자가 있다고 말이다. 여기서 생산된 비교할 수 없이 값싼 전력을 전세계로 배송할 수 있다면 세계 경제는 어떻게 될까.
공상과학 소설속에나 등장할 만한 이같은 구상을 실제로 한 사람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주인공은 테슬라 창업자인 일런 머스크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 구상에 대한 투자 의사를 밝혔다.
소설 같은 일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CNN에 따르면 미국 해군은 지난 5월 인공위성으로 태양광 발전을 해 이를 전자레인지에서 쓰이는 마이크로파로 변환해 지구로 전송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를 다시 전기로 변환해 가정에서 쓸 수 있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구상이 처음나온 건 80년전 아시모프의 공상과학 소설에서다.
관건은 이같은 독점 공급자가 특정 화폐와 배타적 결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지 여부다. 사우디가 미국과 페트로달러 시스템 구축에 합의한 건, 미국이 사우드 가문 왕실의 체제와 사우디 안보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테슬라가 전세계 전기 공급을 독점할 때 일런 머스크가 달러나 특정 국가의 법정 화폐로만 결제하는 데 합의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이 경우 아마도 당근보다 채찍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 정부는 테슬라가 달러로만 결제를 제한하다고 테슬라에만 법인세 감면 등의 혜택을 주기는 힘들다. 반대의 경우 세무조사 등 행정력을 이용해 불이익을 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페이스북이 리브라란 암호화폐 개발을 사실상 포기한 것은 리브라 비전이 세상에 알려지자 미국 정부는 물론 EU 각국 정부가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마크 저커버그조차 관에 미운털이 박히는 건 두려웠던 모양이다.
이런 점에서 일런 머스크가 최근 비트코인에 투자하고, 테슬라차를 비트코인을 받고 팔겠다고 한 건 그 배경을 곱씹어 볼 대목이다. 일런 머스크의 구상이 단순히 전기차를 만들어 파는 게 아니란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스페이스X의 화성개발 구상엔 암호화폐가 화성의 기축통화가 될 것이란 내용도 포함됐다. 다른 사람이라면 허황된 공상이라고 치부하겠지만 그 생각이 일런 머스크의 것이기에 세상은 그의 말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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