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임대차 분쟁의 또 다른 얼굴…임차인도 가해자가 되는 순간

한석진 기자 2025-12-30 10:16:15
소송·가압류로 멈춘 건물들, 보호 제도의 빈틈을 파고드는 사례들
서울의 아파트 단지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코노믹데일리] 임대차 분쟁은 오랫동안 ‘임대인 대 임차인’의 대립 구도로 설명돼 왔다. 제도의 출발점 역시 임차인 보호에 맞춰져 있다. 다만 최근 현장에서는 이 구도가 항상 들어맞지 않는 사례들이 확인되고 있다. 법이 보장한 권리가 분쟁의 종결이 아니라 또 다른 피해를 낳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경우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인근 상권에서는 입지가 좋은 상가 건물이 장기간 공실로 남아 있는 사례가 나타났다. 임대 수요가 꾸준한 지역임에도 건물 전체가 비어 있는 이유는 임차인이 제기한 보증금 반환 소송과 부동산 가압류 때문이었다. 분쟁이 시작된 이후 가압류가 등기부에 기재되면서 신규 임차인 유치는 사실상 중단됐다.

 

임대인 측 설명에 따르면 해당 임차인은 계약 종료 이후 원상복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동시에 건물 전반에 대한 가압류를 신청했고, 이후 소송 절차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판결이 나오더라도 가압류 해제에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분쟁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가압류가 설정된 순간부터 건물의 경제적 기능은 크게 위축된다. 등기부상 분쟁 표시만으로도 예비 임차인들은 계약을 꺼리게 되고, 임대료 수입은 사실상 중단된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발생하는 공실 손해는 법적 분쟁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임대인이 고스란히 부담하게 된다.
 

일부 사례에서는 임차인이 보증금 반환을 의도적으로 미루거나, 보증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경매 절차로 건물을 넘기는 방안까지 검토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임대인은 재산권 행사에 장기간 제약을 받고, 추가적인 소송 비용과 시간 부담을 떠안게 된다.
 

현행 제도상 이러한 행위를 명확히 제지하기는 쉽지 않다. 소송 제기와 가압류 신청은 법이 허용한 권리 행사에 해당한다. 외형상 권리 행사 요건을 갖춘 이상, 그 동기가 악의적이더라도 이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장치는 제한적이다. 결국 임대인은 방어적 대응 외에는 뚜렷한 선택지가 없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임대차 시장을 ‘강자 대 약자’의 단순 구도로만 바라보는 접근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보호가 필요한 임차인이 존재하는 만큼, 제도의 사각지대를 악용하는 임차인 역시 현실에 존재한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쟁이 장기화될수록 그 비용은 당사자를 넘어 지역 상권과 시장 신뢰로 확산된다.
 

임대차 보호 제도의 취지를 유지하면서도 권리 남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악덕 임대인 문제를 바로잡는 것과 동시에, 악덕 임차인으로 인한 피해 역시 제도의 논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