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1조원 투입, AI로 딥페이크 피싱까지 차단 선언SKT 7000억·LGU+ 연 1000억…통신3사, 마지못해 지갑 여나
[이코노믹데일리] SK텔레콤의 대규모 해킹 사태가 통신업계 전반을 뒤흔든 가운데 KT가 향후 5년간 1조원 이상을 쏟아붓는 초대형 정보보호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보안 군비경쟁'에 전격 참전했다. SK텔레콤이 7000억원 투자안을 내놓은 지 불과 열흘 만에 더 큰 규모의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러나 연이어 터지는 대형 보안 사고 이후에야 마지못해 지갑을 여는 듯한 통신사들의 행태에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날 선 비판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 KT, 1조 투자로 '선제 방어'…AI로 목소리 지문까지 잡는다
황태선 KT 정보보안실장(상무)가 지난 15일 KT 고객 안전·안심 및 정보보호 브리핑에서 'KT 정보보호 현황 및 향후 강화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KT]
황태선 KT 정보보호실장(상무)은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국내외 통신사 해킹으로 발생하는 수천억원대 피해 보상을 고려할 때 사후 대응보다 예방 목적의 선제 투자가 훨씬 전략적이고 효과적”이라며 이번 혁신안의 명분을 밝혔다. KT가 내놓은 계획의 핵심은 단순히 방화벽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 AI 기술을 기반으로 한 예측 및 선제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1조원의 투자는 △AI 기반 통합 모니터링 체계 강화(3400억원) △글로벌 빅테크(MS, 구글 등)와의 협업 및 컨설팅 확대(200억원) △‘제로 트러스트(Zero Trust)’ 보안 체계 완성 △보안 전담 인력 2배 확충(500억원) 등 4대 혁신을 중심으로 집행된다. 특히 ‘절대 믿지 말고, 계속 검증하라’는 원칙의 제로 트러스트 아키텍처는 내부망이라도 모든 접속 요구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해 인증과 권한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기존 경계형 보안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다.
고객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생활 밀착형 보안 서비스 고도화는 이번 발표의 백미다. KT는 올 하반기, 목소리의 고유한 특징인 ‘성문(聲紋)’을 AI로 분석해 화자를 식별하는 ‘AI 보이스피싱 탐지 2.0’ 서비스를 통신사 최초로 상용화한다. 이는 기존의 문맥 분석을 뛰어넘어 AI로 만들어낸 가짜 목소리, 즉 ‘딥페이크 보이스피싱’까지 탐지할 수 있는 차세대 기술이다. KT는 이를 통해 탐지 정확도를 95%까지 끌어올려 연간 약 2000억원 규모의 범죄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통신3사, 앞다퉈 조 단위 투자…그러나 '왜 이제야'
통신3사 IT 및 정보보호 투자 현황[사진=그래픽팀]
KT의 이번 발표로 국내 통신 3사는 모두 조 단위에 육박하거나 이를 뛰어넘는 보안 투자 계획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그 시점을 살펴보면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통신사들의 대규모 보안 투자 발표는 언제나 대형 보안 사고가 터진 직후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LG유플러스는 2023년 초 18만명의 고객 정보 유출 사고를 겪은 뒤에야 향후 5년간 정보보호에 1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연간 1000억원 규모로 투자를 확대하며 CEO가 직접 주관하는 정보보호위원회를 운영하는 등 보안 체계를 강화했다. SK텔레콤 역시 이번에 2700만 건에 달하는 유심 정보가 유출되고 정부로부터 ‘사업 등록 취소’라는 초강경 압박까지 받은 뒤에야 5년간 7000억원 투자와 100억원 기금 출연이라는 대책을 내놨다.
그리고 KT는 SK텔레콤의 정보보호 투자계획 발표 후 불과 열흘 만에 이를 상회하는 1조원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황 실장은 “SKT 사고 이전부터 미국 통신사들의 대규모 해킹 사례를 보며 꾸준히 대응책을 고심해왔다”고 선을 그었지만 경쟁사의 위기와 정부의 압박이 없었다면 과연 이 시점에 이 정도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결국 세 회사 모두 고객 정보가 대규모로 유출되고 사회적 지탄이 쏟아진 뒤에야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은 셈이다. 이는 정보보호가 기업의 최우선 가치가 아닌 위기 대응을 위한 ‘비용’이나 ‘홍보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는 방증이다.
한 보안업계 전문가는 “통신사들이 발표하는 제로 트러스트나 AI 보안 모두 수년 전부터 중요성이 강조되던 개념”이라며 “대규모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통신사들이 이제 와서야 기본적인 보안 체계에 막대한 투자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동안의 안일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물론 늦게나마 통신사들이 보안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AI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개인 데이터 보호는 통신사의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투자 경쟁이 또 한 번의 ‘보여주기식’ 행보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발표에 그치지 않는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이행과 함께 보안을 기업 문화의 최상위 가치로 삼는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