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자수첩] 586 컴퓨터로 '배그' 돌린다는 민주노총

성상영 기자 2022-12-08 10:14:15
싸늘한 여론 속 '총파업' 동력 약화 개인이 우선인 시대…'계급'의 종말 낡은 투쟁론에 사회적 고립 가속화

산업부 성상영 기자

[이코노믹데일리] 인텔 코어 i5-4430 중앙처리장치(CPU)와 8기가바이트(GB) 이상 램(RAM), 엔비디아 지포스 GTX 960 그래픽카드와 33GB 이상 여유 공간이 있는 저장장치. 인기 게임 '배틀그라운드(배그)'를 구동하기 위한 컴퓨터의 최소 요구 사양이라고 한다.

널찍한 필드에 나홀로 떨어져 99대 1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 게임이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단지 배그를 즐기기 위해 최신 컴퓨터 부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래픽카드 대란 주범이 암호화폐 채굴업자라면 종범은 배그 플레이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최근 산업계에 불어닥친 운송 대란의 주범으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지목됐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산하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가 파업이란 이름으로 집단 운송 거부에 나서면서다.

공장에서 갓 나온 신차는 구매자 손에 넘어가기도 전에 사고로 박살이 나고 공사 현장은 멈췄다. 유류고는 넘치는데 오일쇼크를 걱정하는 상황이다.

민주노총은 화물연대 운송 거부를 엄호하려고 '총파업' 깃발을 들었으나 동력이 부족하다. 한국철도공사와 서울교통공사는 파업 직전에 기수를 돌렸고 현대중공업그룹 최초 3사 공동 파업을 내건 조선 노조도 일터로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 금속노조 포스코지회는 "우리가 자동현금인출기(ATM)냐"라며 독립을 선언했다.

정부는 업무 개시 명령과 운송 면허 취소라는 카드를 꺼내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여론은 화물연대 운송 거부와 이를 감싸는 민주노총 총파업에 냉담하다. 정부가 민주노총과 화물연대를 때릴수록 윤석열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오른다. 여론이 정부의 동력인 셈이다.

여론이 민주노총·화물연대에 등을 돌린 건 단지 소비자가 차를 못 받아서, 정유사가 기름을 못 팔아서, 건설 일용직 노동자가 일당을 못 받아서만은 아닐 테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에 공감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소위 MZ세대 중에는 아예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2022년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어느 기업의 직원, 신차를 구매한 소비자, 건설 현장의 미장공이 살아가는 시대다.

'그들'의 투쟁론은 지금 586(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이라고 불리는 세대가 남긴 유물이다. 이들은 이념을 산업 현장에 옮겨 심고는 386이 되어 그들을 떠났다. 지금 동투(冬鬪)에 전념인 사람들은 586, 그보다 못한 하드웨어를 얹고 배그를 플레이하려 한다. 계급은 종말했는데 낡은 투쟁론으로 '그들만의 리그'가 한창인 상황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화물연대가 집단 운송 거부에 나선 가운데 서울 한 주유소 입구에 유류 가격표 대신 화물연대 규탄 문구가 붙어 있다.[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