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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갑'으로 군림한 손보사…시민사회 "정부 무관심이 사태 키웠다"

성상영, 신병근, 김현수 기자 2022-09-30 00:00:00
'을'로 전락한 정비업체, 종합보험 성장으로 뒤바뀐 역학관계 시민사회도 "정부가 손보사 횡포 방치"…사각지대 해소 시급

삼성화재·DB손해보험·현대해상·KB손해보험 등 4대 손보사 사옥 [사진=각 사]


"현대판 노예계약", "돈줄 쥔 갑(甲)의 횡포"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대형 보험사 사슬에 묶인 영세 자동차 정비업계가 울부짖고 있다. '협력사' 가면을 쓴 손해보험사들은 우월적 지위로 동네 정비사를 옥죈다. 수리비용 단가 후려치기와 미납·지급 지연은 차고 넘친다. 불만 표시로 낙인 찍힌 업체는 소송에 휘말리기 일쑤다. 업계 갈등을 풀어야 할 정부와 관계 당국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본지는 업태 질서를 황폐화시키는 손보사 갑질 민낯을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손보사 횡포에 정비업계 "살려달라"...공임비 '후려치기'
② 홍원학·김정남 "협력업체와 상생" 헛발질…손보사 수리비 미납 '고질병'
③ 손보사 횡포 부른 불명확 '공임'…3년만에 산출식 찾는 '뒷북행정'
④ 국회, 빅4 손보사 갑질에 '속수무책'…10월 국감서 칼 빼든다
⑤ '갑'으로 군림한 손보사…시민사회 "정부 무관심이 사태 키웠다"


손해보험사가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일선 정비업체를 상대로 차량 수리비를 깎거나 늦게 지급하는 행위는 뿌리 깊은 악습으로 자리 잡았다. 대다수 정비업체는 불이익을 당하고도 손보사에 이의를 제기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손보사는 겉으로만 상생을 외치고, 자동차보험 운영 실태를 관리·감독해야 할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놨다. 정치권도 국정감사를 앞두고서야 문제를 들여다보겠다고 나섰다.

자동차보험 수리를 둘러싼 손보사와 정비업체 간 갈등을 풀고 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관련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자동차보험 의무화 60년, 정비업체는 어떻게 '을'이 됐나

자동차보험 가입 의무화는 국내에서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자동차손배법)이 처음 시행된 1963년에 이뤄졌다.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열리기 훨씬 이전부터 자동차보험 시장이 만들어졌지만 시스템은 여전히 후진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정비업계에 따르면 손보사와 정비업체 간 '갑을(甲乙)관계'가 형성된 건 20년 전 무렵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정비업체 대표들은 2000년대 들어 손보사의 '갑질'이 시작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정비업에 20년 이상 종사하며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다.

이 무렵 자동차 등록대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자동차보험 가입자 수가 덩달아 증가했다. 통행량이 늘어나고 차량 가격도 꾸준히 상승하면서 의무보험 이외에 보장 범위를 확장한 종합보험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손보사들은 수익을 늘리기 위해 종합보험을 적극적으로 판매했다. 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종합보험 가입률은 자기차량손해(자차보험) 가입률(70%)과 비슷하거나 이보다 높을 것으로 추산된다.

종합보험 가입자 증가는 정비업체의 일감을 늘렸다. 사소한 사고도 보험 처리하는 운전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손보사 직원들은 정비업체를 찾아다니며 영업을 뛰었다. 보험수리 네트워크를 남들보다 먼저 확보해 소비자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특정 손보사가 지정한 '우수 협력업체' 간판이 정비업체마다 내걸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한동안은 '허니문'이 이어졌다. 흔히 공업사라고 불리는 정비업체는 몰려드는 보험수리 물량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손보사가 수리비를 깎거나 지급을 미루는 일도 거의 없었다.

종합보험이 일반화되고 자동차보험 시장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자 지위도 바뀌었다. 정비업체는 점점 보험수리를 주된 수입원으로 삼았다. 정비업체의 전체 매출 가운데 보험수리 비중은 60~70% 수준으로 파악됐다. 보험수리에 의존해 사업을 꾸리게 된 것이다.

◆시민사회 "당국 무관심이 사태 키워"…보험수리 법제화 목소리

자동차 보험수리는 차량 소유주가 정비업체에 차를 맡기면 정비업체가 이를 수리하고 손보사에 비용을 청구하는 구조다. 그러나 손보사와 가입자(차량 소유주) 관계만 법 테두리 안에 존재한다.

손보사와 정비업체 간 갑을관계가 고착화된 상황이지만 이를 규율할 제도적 장치는 전무한 셈이다. 단지 정비 시간을 표준화하고 적정 정비요금을 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시민사회에서는 정부와 정치권의 무관심이 사태를 키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실련은 30일 "국토부가 영세 공업사들이 당하는 피해에 대해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들을 보호하려는 책임감도 없다"며 "정부가 나서서 어느 한쪽을 보호하거나 제재하지 않는다면 손보사의 횡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는 "손보사의 일탈은 감독기관, 주무부처의 비전문성과 업무 태만이 복합된 문제"라며 "다가오는 국정감사에서 국회의 소관 상임위원회가 책임을 묻고 제도 개선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리비를 결정 짓는 손해사정 기능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손보사가 설립한 자회사가 손해사정을 맡음으로써 손보사에 유리한 쪽으로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정비업체가 손보사에 보험금을 청구할 권리가 제도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참여연대는 "법적으로 보험금 청구권을 정비업체에 보장해야 한다"며 "손보사가 자회사에 손해사정 일감을 몰아주는 행위를 제한하고, 차량 소유주는 물론 정비업체에 손해사정 근거를 의무적으로 제공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수리비 분쟁과 관련한 심의·중재 기구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요양급여 수준을 심의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나 교통사고 과실 비율을 조정하는 자동차사고 과실비율 분쟁심의위원회처럼 '자동차보험심사평가원' 같은 기구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다. 이를 통해 수리비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고, 수리비 청구와 지급이 객관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

결국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손보사·정비업체 관계를 법제화하는 작업이 선결 조건이다. 국감을 계기로 국회와 정부가 관련 사안을 주의 깊게 살피고 대책 마련에 나설지 주목된다.